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세기말의 불안 때문일까.곧 개봉될 ‘아마겟돈’ ‘고질라’와 현재 상영중인 ‘딥 임팩트’ 등 재난을 다룬 올 여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통된 소재는 ‘지구의 종말’이다.
이 영화들은 냉전시대 적국 출신의 테러리스트(다이하드3)나 외계인(인디펜던스 데이)의 공격, 한 도시에 국한된 재앙(볼케이노, 단테스 피크) 등을 소재로 했던 지난해까지의 할리우드 재난, 액션영화들과 궤를 달리 한다.
선과 악의 고전적 대결구조에서는 선이 우여곡절 끝에 악을 물리치면 평화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름 영화엔 선과 악 대신 지구를 집어삼킬 듯한 초자연적인 힘의 공격과 생존 그 자체를 목표로 한 인간의 방어가 자리잡았다.
‘딥 임팩트’와 ‘아마겟돈’에서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공포의 근원은 지구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혜성와 소행성. ‘고질라’에서는 핵실험으로 인한 유전자 변이로 탄생한 초대형 괴물 고질라와 2백마리의 새끼가 그 역할을 떠맡았다.
세 영화에서 재난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도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모두 미국의 뉴욕.
뉴욕 맨해튼 앞바다에 떨어진 혜성의 파편이 일으키는 해일이 뉴욕시 전체를 삼키고(딥 임팩트) 뉴욕 중심가에 떨어진 소행성의 파편에 맞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나무젓가락처럼 뚝 부러진다(아마겟돈). 초대형 괴물 고질라는 현대판 밀림이라 할 맨해튼의 빌딩숲사이에서 헬기와 쫓고 쫓기는 격전을 벌인다.
이들 영화에서 뉴욕은 종말의 위기에 처한 지구를 상징한다. 권력의 힘과 인간의 한계가 극점에 도달한 무대이다. 모든 위대한 것들의 집결지, 인간의 욕망이 창조해낸 이 견고한 도시 역시 초월적인 존재의 공격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냉전도, 영웅의 시절도, 제국주의의 패권도 끝나버린 새로운 시대에도 해결사는 여전히 미국이라는 집단적 영웅이다. 영화속에서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 5형제’는 여전히 미국의 대통령과 시민들이다.
미국이 길러온 군사력과 핵무기가 인류의 평화를 수호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등장한다는 점도 새로운 ‘팍스 아메리카나’를 옹호하는 할리우드의 음험한 속내를 드러낸다.
세기말 불안의 이미지와 미지의 힘이 야기하는 종말의 공포를 상품으로 만들어내면서 할리우드는 치기어린 장난도 슬쩍 집어넣었다.
지나가다 꼬리가 닿기만 해도 고층 빌딩이 박살나는 천하무적 ‘고질라’에게도 천적이 있다. 바로 ‘아마겟돈’에서 고질라 인형을 사정없이 물어뜯는 강아지다. 올 여름 최대의 경쟁자인 상대 영화를 비꼬는 방법도 이쯤되면 할 말을 잃게 한다.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