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현실 속 엘리자베스의 위치는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그렇게 위험하지 않았다. 두 강대국인 스페인과 프랑스는 엘리자베스를 미워하는 것보다 서로를 더 미워했고, 영리한 엘리자베스는 이를 잘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쯤이면 혈통에 의한 적법한 왕위계승의 개념이 확고해졌기 때문에 연약한 처녀왕이지만 엘리자베스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역사적으로 무엇보다도 그녀는 신민들로부터 사랑받은 군주였다. 그녀가 남긴 신화는 바로 그 점에 있다.
최근 연구들은 엘리자베스가 알려진 것처럼 유능한 국왕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자존심이 강했던 여왕은 의회와의 타협이 싫어 왕실재산을 매각해 사용함으로써 왕실재정을 고갈상태로 이끌었고 이것이 훗날 영국혁명의 한 원인이 되었다. 잉글랜드의 해군력을 세계제일로 만든 계기가 된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전쟁도 너무 무모한 짓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화에서 그녀는 결국 일생 사랑했던 더들리를 포함해 아무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잉글랜드와의 결혼을 선언한다. 이 유명한 연설은 실상 그녀가 죽기 얼마 전에 행해졌다. 월싱엄은 여왕에게 국민이 원하는 것은 성모 마리아의 대체물이라고 충고한다.
그렇다면 영화속 마지막 장면의 엘리자베스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인가, 아니면 신부(新婦)로서의 모습인가. 엘리자베스는 아마 두가지 다를 원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이중성과 당시 분위기를 비교적 충실하게 옮기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다.
박지향
(서울대교수·영국사)
◆ 영화‘엘리자베스’는…‘
엘리자베스’는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작 중 국내에서 가장 늦게 공개되는 화제작. 타이틀롤을 맡은 케이트 블랑쉬가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미술 의상 촬영 등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돼 있다. 20일 개봉.21살의 엘리자베스가 반란죄목으로 런던탑에 끌려갔던 1554년부터 즉위 초반까지를 그렸다. 종교와 귀족 집단을 둘러싼 어두운 권력투쟁과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두축으로 삼아 순진무구한 처녀가 강인한 여왕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감독은 ‘밴디드 퀸’을 연출한 인도 출신의 세카르 카푸르.
〈김갑식기자〉gs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