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쉬리’, 장영주 연주회, 이중섭 전시회, 뮤지컬 ‘명성황후’에 따라붙는 단어들이다. 이른바 ‘흥행신화’가 문화계에서도 최대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영화 가요 등 태생부터 흥행에 민감했던 장르 외에 ‘점잖은 분야’인 공연 출판 미술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아래서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만 흥행에 성공한다는 것. CF문구대로 ‘1등감자만 살아남는 슬픈 현실’이 도래한 것이다.
◇ ‘즐거운’ 넘버 1
삼성영상사업단에 따르면 약 35억원(제작비 23억+마케팅비 12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 ‘쉬리’는 10일 서울 관객 2백만명(전국 5백만명)을 돌파할 경우 극장측과 5대5로 나눈 입장료 수입만 1백10억원대를 기록하게 된다. 반면 올해 한국영화 중 서울관객 40만명대를 기록한 ‘미술관옆 동물원’은 초라한 ‘넘버 2’가 아닐 수 없다.
“웬만한 음반은 1만장 판매도 어렵다”는 가요계에서도 ‘H.O.T’는 1월 서울 세종문화회관 공연에서 발매 26분여만에 3만5천여장의 입장권을 매진시켰다. 1일 끝난 장영주 바이올린연주회의 입장권은 공연 2주전 매진됐다. 미술의 ‘이중섭특별전’은 약 9만명의 입장객을 동원, 입장료와 팜플렛 판매로만 3억원이상의 매출을 기록했다.미국에 진출했던 뮤지컬 ‘명성황후’는 3월 공연에서 3주만에 10억원을 웃도는 수입을 올렸다.
문제는 이들 ‘1등 상품’을 제외한 나머지 상품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는 점. 클래식음악 공연장에는 초대권 손님을 빼면 표를 산 관객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고 출판계에서도 유명 작가중에서도 몇몇 대중성있는 작가를 빼면 5천권을 넘기기도 어렵다. ‘1등만의 잔치’만 남다 보니 예술영화, 소극장 공연, 문화계 신인들의 공연 전시가 위축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 왜 1등만 살아남나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IMF사태로 인한 문화지출의 감소를 이유로 꼽는다. 예전같으면 두가지이상의 상품을 사던 소비자들이 한가지로 소비를 줄였다. 1등을 제외한 나머지의 판매가 부진해지고 신상품은 선보이기조차 어렵게 됐다는 분석.
1등끼리 모이는 스타들의 ‘쏠림’현상도 문화상품의 명암을 더욱 엇갈리게 만들고 있다. 시네마서비스의 강우석대표는 “스타 연기자외에도 스타감독 스타기획자 등 이미 A급으로 검증된 스타들의 공동작업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주입식 교육으로 ‘정답’을 찾는데 익숙해진 문화소비자들이 스타 또는 이미 1등으로 판정된 상품, 남들이 좋다고 하는 상품을 찾아 안정적인 선택을 하는 것도 또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명지대 김재범교수(국제경영학)는 “한국시장에서 빅히트시키기 위해서는 참신한 기획과 뛰어난 완성도, 충분한 마케팅 등이 기본조건”이라며 “구전효과와 ‘쉬리를 안보면 왕따가 된다’는 식의 사회적 요인이 작용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 21세기 문화르네상스는 가능한가
삼성경제연구소 김휴종박사는 “중세 르네상스시대에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이 위대한 ‘문화상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귀족들이 무제한의 제작비를 투자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이제 문화는 어떤 장르든 하나의 엔터테인먼트(흥행)로, 경제의 프리즘으로 읽히기 시작했다는 것. 21세기 문화는 장사가 되는 상품에 대한 선택적 투자로 이뤄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문화의 세기라는 21세기. 전문가들은 15세기의 세종시대―18세기의 영정조시대에서 이어지는 3백년만의 문화 르네상스를 맞기 위해서는 빅히트 문화상품이 ‘반짝 흥행’으로 그치게 해서는 안된다고 입을 모은다. 각분야가 고루 발전할 수 있도록 21세기를 내다보는 정부의 문화정책 마련도 시급하다.
〈김갑식·이승헌기자〉gs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