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내가 기다리고 있는데 올려 보낼까요?"
중고 가게에서 산 1달러 짜리 카우보이 모자 속에 풍성한 금발을 말아 올리고 남편의 셔츠를 빌려 입고 나타난 그 사내가 21세기 첫 오스카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될 지는 아무도 몰랐다.
남자가 되고 싶어 남자처럼 살다 성폭행 당한 뒤 처참하게 숨진 브랜든 티나의 실화를 그린 <소년은 울지 않는다>의 주인공 힐러리 스왱크(25)의 운명은 이렇게 바뀌어갔다.
"아주 오랜 여행을 끝낸 기분입니다."
수상 소감의 첫 마디처럼 스왱크는 이 작품을 위해 머나먼 길을 걸어야 했다. 캐스팅이 확정되자마자 스왱크는 여성 감독 킴벌리 피어스가 이끌고 간 미용실에서 금발을 싹둑 잘랐다.한 달 동안 철저하게 남자로 살라는 명령을 받은 그는 영화 속에서처럼 하복부를 부풀리기 위해 팬티 속에 양말 뭉치를 집어 넣었고 붕대로 가슴을 눌러 싸매야 했다.
목소리를 반 옥타브 낮추고 남자처럼 산 지 어언 한 달. 사람들은 서서히 그를 지칭할 때 She 대신 He를 사용했고 영화를 절반 넘게 찍을 때 쯤에는 스왱크도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2백만 달러(22억원)짜리 저예산 영화인데다 동성애 코드까지 담긴 자신의 영화에 관심을 가져준 아카데미 위원회, 영화에 애정과 영혼을 불어 넣어준 관객, 영화를 만드는 동안 자신의 정체성을 단단하게 붙들어준,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 브랜든 티나에게 두루 사의를 표명한 스왱크는 자기 자신에게도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도 원했던 남자 복장을 하고 난 뒤에 느낀 생경함, 남성으로 인정받기 위해 육신을 학대하는 고통, 남자의 모습으로 여자 친구에게서 사랑을 얻어낸 자신감, 성전환 수술에 대한 두려움, 남자들에 의해 무참하게 성폭행 당한 뒤의 참혹함을 보여준 그의 연기는 치하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보수적인 아카데미가 관록의 연기자 메릴 스트립과 강력한 후보 아네트 베닝을 두고 스왱크에게 영광의 트로피를 건넨 것도 자기와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는, 편견에 가득 찬 세상에 경종을 울린 그의 연기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화에서 선머슴아 같은 차림으로만 등장한 탓에 어떤 모습으로 시상식에 나타날까 궁금증을 자아냈던 스왱크는 커트 머리와 쑥색의 우아한 롱 드레스 차림으로 자신의 여성미를 한껏 과시했다.
여덟 살에 연기를 시작했고 <더 넥스트 가라데 키드>같은 작품에 출연해 오면서 무명의 설움을 딛고 정상에 선 스왱크는 어쩌면 자신의 이런 옷차림에 적잖은 의미를 부여해야 할 지도 모른다.
관객의 뇌리에 깊이 박힌 남장 여인의 이미지를 본래의 여성스러운 모습으로 송두리째 털어내야 하는 숙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스카는 그의 배우생활에 영원한 족쇄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김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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