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7일 제7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처음 만나는 자유(Girl,Interrupted)’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안젤리나 졸리(25)가 울먹이며 밝힌 수상 소감의 일부다. 그의 아버지는 다름아닌 78년 ‘Coming Home’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연기파 배우 존 보이트. 피는 속일 수 없는 것일까? 아버지로부터 번득거리는 눈빛과 두툼한 입술을 선물받은 졸리의 특이한 웃음을 대할 때 ‘보이트 가문’에 대한 설명을 빠뜨릴 수는 없다. 미국 로스앤젤리스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 마쉘린이 모두 배우인 집안의 영향으로 7세 때부터 아역 배우로 출연하면서 카메라를 익혔다. 또 22세이던 97년 TV 시리즈 ‘True Women’으로 성인배우로 데뷔했고, 한때 직업 모델로 일하면서 ‘롤링 스톤즈’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기도 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장 옆자리에서 축하 키스를 나누던 오빠 제임스 헤이븐도 배우이고, 지난해 이혼한 전 남편 조니 리 밀러도 역시 배우. 졸리에게 ‘예쁘다’ 또는 ‘지적이다’는 평은 어쩐지 허전하다. 그의 얼굴은 조목조목 뜯어보면 그다지 예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비쳐지는 그의 이미지는 어두운 관능의 그림자와 때로는 카리스마까지 느껴지는 강렬함이다.
그가 영화 속에서 본격적으로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개봉된 ‘본 콜렉터’. 졸리는 덴젤 워싱턴이 사고를 당해 손가락 하나 밖에 움직일 수 없는 법의학 수사관으로 출연한 이 작품에서 여경찰관 에밀리아로 등장했다. 연쇄살인범의 눈길과 숨결을 느끼면서도 뒷걸음치지 않는 당차고 지적인 분위기였다. 이어 ‘에어 컨트롤’에서는 관제사 러셀(빌리 밥 손튼 분)의 부인 마리 역을 맡아 특유의 퇴폐적인 매력을 선보였다.
여기까지는 아무래도 보이트의 ‘좀 특이하게 생긴 딸 졸리’ 정도가 세간의 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광이자 벗어야할 무거운 짐으로 여겨졌던 ‘보이트의 딸’이라는 딱지를 뗄 기회는 곧 찾아왔다. 60년대 정신병동에 수감된 여성 환자들의 구속과 자유, 우정과 배반 등을 그린 ‘처음…’(6월 개봉예정)에서 정신병자인 주인공 수잔나 역의 위노나 라이더를 빛내주는 것이 조연 졸리의 몫이었지만 그는 이 임무를 이행할 수 없었다. 섹시하면서도 위험한 카리스마로 가득찬 정신병자 리사 역의 그가 라이더를 가려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의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졸리가 바로 리사였다”면서 “졸리는 자신의 캐릭터와 세계를 명확하게 볼 줄 아는 능력을 지닌 배우”라고 말했다.
졸리와 ‘처음…’의 리사는 닮았는지도 모른다. 미국 언론에서도 거의 한 세대만에 다시 오스카 트로피를 보이트 가문에 안겨준 졸리를 꽤 특이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 그의 몸 여기저기에는 문신들이 많다. 왼쪽 손목의 ‘H’자는 현재 데이트 중인 배우 티모시 허튼의 이니셜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졸리는 현재 스릴러 ‘Dancing In The Dark’와 범죄를 소재로 다룬 ‘Gone In Sixty Seconds’에 출연하고 있다. 위험하면서도 매력적인 졸리. 성인연기를 시작한 지 3년만에 오스카 트로피의 주인공이 된 이 배우가 계속 조연으로 남으리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제 없다. 그가 최근 인기 컴퓨터 게임을 영화화한 ‘Tomb Raider’에서 엘리자베스 헐리, 캐서린 제타 존스 등 쟁쟁한 후보들을 물리치고 주인공 라라에 캐스팅된 것은 그 시작일지도 모른다.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