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의 SF어드벤처 영화에서 영웅들이 승리하는 원동력은 불굴의 모험심과 용기, 또는 과학의 힘에 기반한 팀웍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4월 29일 개봉된 SF영화 '갤럭시 퀘스트(Galaxy Quest)'에서 위기에 처한 주인공들을 구해준 영웅은 TV쇼 '은하방위대'에 푹 빠져 우주선의 구조와 비상 탈출구의 위치를 줄줄 꿰고 있는 10대 소년들입니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엉뚱한 데에나 빠져있는 애들이 우주를 구하다니!
'갤럭시 퀘스트'는 배꼽 빼는 코믹 SF어드벤처 영화입니다. 개봉 주말, 이 영화의 관객수가 '폼생폼사'하는 액션영화 '아나키스트'의 절반 정도 밖에 안되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SF영화 '스타 트렉'에 대한 패러디가 빼곡이 들어차 있는 '갤럭시 퀘스트'의 이면에는 '오타쿠'들에게 보내는 찬사가 듬뿍 담겨 있습니다.
일본에서 비롯돼 이제는 영어권 지역에서도 보통 명사처럼 쓰이는 오타쿠는 자기만족적인 마니아 수준을 넘어서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전문적 식견까지 갖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원래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했지만 오타쿠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일본의 문화상품인 애니메이션의 창조자들로 주목받으면서 긍정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죠.
'갤럭시 퀘스트'에서 10대 소년들 뿐 아니라 TV쇼 '은하방위대'를 실제 있었던 일로 착각하고 거기 나오는 우주선의 작동원리를 연구해 똑같은 구조의 첨단 우주선을 만들어낸 외계인들도 일종의 오타쿠가 아닐까요? 바보같고 맹신에 빠진 외계인들을 통해 오타쿠를 놀림감으로 삼기도 하지만 '갤럭시 퀘스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준비가 되어있는 오타쿠들을 위한 선물세트같은 영화입니다. '은하방위대'의 영웅들은 외계인들의 황당한 믿음을 끝까지 깨뜨리지 않고, 10대 소년 오타쿠들에겐 그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세계에 개입할 기회를 주니까요.
그런데 이게 다 허구일 뿐일까요? 천만에! 이 외계인들과 10대 소년들은 '갤럭시 퀘스트'가 패러디한 영화 '스타 트렉(Star Trek)'에 열중하는 오타쿠들, 속칭 '트레키(Trekkie)'와
너무 닮았습니다. 최근 트레키에 대한 인류학적 조사 보고서라 할 만한 다큐멘터리 '트레키스(Trekkies)'의 비디오 테입을 구해 봤는데 북미 지역의 트레키들은 확실히 별난 데가 있어요.
한 캐나다 사람은 '스타 트렉'시리즈에 나왔던 전동 의자를 직접 만들어 타고 다니는가 하면, 어느 치과의사는 자기 병원 내부를 마치 우주선처럼 치장해놓고 기공사들도 제복을 입고 근무하게 할 정도입니다.
트레키들은 때로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한 여자는 '스타 트렉'에 나오는 우주선 장교의 제복을 입고 가서 판사가 나무라자 "대통령이 재판을 받는다 해도 나는 이 제복을 입겠다"고 맞섭니다.
어떤 열성 팬들은 '스타 트렉'에 나오는 외계 종족인 클링곤 인들의 말을 배우고 그 말로 번역된 성경까지 갖고 있을 지경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클링곤 말로 번역하겠다는 야심만만한 트레키도 있지요.
'스타 트렉'이 취미를 넘어선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이들에게 '스타 트렉' 탐구는 장난이 아니라 심각하고 진지한 일입니다. '스타 트렉'에 나오는 엔터프라이즈 호와 복잡한 장비들의 구조에 통달한 14살짜리 소년은, '갤럭시 퀘스트'에서 주인공들이 위기에 처하자 해박한 지식으로 탈출로를 알려주는 10대 소년들과 똑같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오타쿠였던 안노 히데야키 감독이 '신세기 에반겔리온'으로 세계를 재패했듯, 어쩌면 트레키들 중 일부는 미국의 과학기술을 선도하는 사람이 돼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혹 창조적인 결과물이 없다 한들 뭐 대수겠습니까. 자기를 넘어서는 초인적인 의지까지는 엄두도 못내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늘 두통거리인 '나'를 잊고 무엇에든 몰입해보는 경험은 삶의 질을 달라지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몰입이 강박적인 집착으로 치달으면 음산한 괴짜 오타쿠가 되던가 그 대상이 사람일 경우에는 스토커가 되겠지만, 관심을 사심없이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의 삶이란 얼마나 삭막하겠습니까.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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