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편의 영화가 아주 닮은 꼴이기 때문이지요. 둘 다 복잡한 생각 하지 않고 허리가 아플 정도로 웃으면서 보게 되는 영화이고, 보고 나면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차오르게 되니까요. 웃음 속에 평범한 소시민에 대한 짙은 연민이 깔린 이 두 편의 영화가 요즘 극장과 비디오를 통해 영화속 주인공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관객의 사랑을 듬뿍 받는 건 왠지 우연만은 아닌 듯합니다.
'반칙왕'이 올해 초 개봉됐을 때 일부에서는 이미 4년전에 만들어진 '쉘 위 댄스'에 대한 모작(模作)의 혐의를 제기할 정도로 두 영화의 주제와 정서는 비슷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의심의 눈길은 거두어도 될 것같아요. 사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람이 달콤한 일탈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는 설정이 사실 뭐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반칙왕'의 대호와 '쉘 위 댄스'의 스기야마는 둘 다 건조하고 무기력한 일상에 지친 샐러리맨들입니다. '쉘 위 댄스'에서 "스물여덟에 결혼하고 서른에 아이 낳고 마흔에 집을 사며 이게 행복이라고 느꼈지만 뭔가 허전했다"는 스기야마의 고백은, 신랄한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브뤼크네르가 이름붙인 '사회학이 만들어낸 우울증'과도 잇닿아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내밀한 몸짓까지도 사회학적 통계로 환산되는 세상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가 뻔히 보이는데 나 자신을 창출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외적인 존재에 대한 낭만적 매혹은 종종 이처럼 소시민의 원형으로 빠져드는 데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두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매혹된 대상은 엉뚱하게도 한 물 간 프로 레슬링이거나 칙칙한 이미지의 사교 댄스입니다. '반칙왕'은 프로 레슬링과 1970년대를 연상시키는 배경을 통해 '촌스러움'에 담긴 그 시절의 애환을 그리워하고 서투르지만 인간적인 것들을 옹호하지요. '쉘 위 댄스'에서 댄스 교습소는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마치 가족처럼 모여 인생의 즐거움을 발견하고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공동체입니다. 이 두 영화는 사양 종목에 대한 애정을 통해 현대인이 잃어버린 가치에 대한 향수를 절묘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두 영화가 끝날 때까지 흐뭇한 웃음을 머금게 하는 건 '안전한' 영화여서가 아닐까요? 춤과 프로 레슬링에 빠진 주인공들은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춤바람'에 대한 비난앞에서 자유롭고 스기야마처럼 산뜻해져 일상으로 되돌아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러고 보면 '쉘 위 댄스'와 '반칙왕'이 관객의 마음을 잡아끄는 이유는 간단해 보여도 좀처럼 이루기 어려운 소시민들의 꿈을 대신 꿔주고, 끝이 불안한 희열보다는 부드러운 위안을 주는 판타지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동아일보 문화부기자>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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