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존]연기를 하는 액션배우 '러셀 크로'

  • 입력 2000년 5월 26일 12시 01분


80년대 중반, 친구들과 함께 밴드를 조직한 한 젊은이는 '말론 브란도처럼 되고 싶어 I Wanna Be Like Marlon Brando'라는 노래를 불렀다. 친구들은 누구도 배우가 되겠다는 그의 꿈을 믿지 않았지만 그 자신만은 배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10년 뒤, <인사이더>의 감독 마이클 만은 그를 "젊은 말론 브란도"라고 불렀다. 10년 전의 노래를 현실로 만든 호주 청년. 그가 러셀 크로(36)다.

다정한 성품과 난폭하고 무례한 기질이 충돌하는 배우.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내면을 가장 깊숙한 곳까지 성찰하는 크로는 그처럼 말론 브란도를 연상시킨다. 이기적인 욕심이 지배하는 헐리우드를 지겨워 하는 것과 그 반항을 숨기지 않는 것까지도 그를 꼭 닮았다. 그러나 크로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언론이 만들어 낸 환상"일 수 있다. 누군가는 그를 로버트 미첨에 또 다른 누군가는 그를 닉 놀테에 비교하지만, 크로는 어떤 배우와도 비교당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내 젊은 시절을 연상시킨다"는 안소니 홉킨스의 회상마저 그는 비웃을 지 모르겠다.

욕을 입에 달고 다니는 것으로 악명 높은 그는 출발부터 위험과 맞닿아 있었다. 그가 호주 스킨헤드 족의 일원으로 출연한 <이유없는 반항>은 악몽처럼 끊어지지 않는 폭력의 사슬과 기이한 사랑이 만나는 영화다. 방향을 잘못 찾은 젊은이들의 분노, 테러와 도주가 이어지는 이 영화에서 샤론 스톤은 "영화에서 본 가장 섹시한 배우" 러셀 크로를 발견했다. 그리고 나약하게 갈등하면서도 억눌린 분노를 드러내는 크로는 생기없는 서부극 <퀵 앤 데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존재가 되었다. 그를 스타의 자리에 올려 놓은 느와르 에서도 크로는 양면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진실을 표현한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형사 버드 화이트. 화를 참지 못하고 피의자를 구타하는 그는 마주치지 않는 편이 나을 사람으로 보이지만 사랑에 진실하고 동료에게 충실하다. 차갑게 흔들리지 않는 <케이프 피어>의 로버트 미첨과 달리 그는 불안하게 동요한다. 어쩌면 그것이 더 위험한 징후일지 모른다. 언제 어떻게 폭발할 지 짐작할 수 없으므로.

크로는 물론 뛰어난 배우다. 그러나 말론 브란도가 반항하는 젊음의 상징으로 등극한 것이 단순히 연기력 때문은 아니었듯, 크로에게도 영혼을 지배하는 무언가가 있다. <미스터리 알래스카>에 함께 출연한 배우 버트 레이놀즈는 그것을 '불'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밤에도 낮에도 종일 타오르는 불을 품고 있다. 그것은 그에게 상처를 입힐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런 종류의 불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53세의 제프리 와이갠드 역으로 18세나 젊은 크로를 선택한 <인사이더>의 감독 마이클 만도 그의 가슴 속에서 비슷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50대의 훌륭한 배우도 많다며 <인사이더>를 거절한 크로에게 마이클 만은 그의 가슴을 짚으며 말했다. "나는 나이를 보지 않는다. 이 안에 있는 것을 본다"라고. "나이와 용모와 머리색, 그 너머의 것을 보는 감독" 마이클 만에게 설득당해 크로는 담배 회사의 음모를 고발하는 소심한 과학자 와이갠드가 되었다. 그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가 되었지만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지는 그의 패배를 점쳤다. "헐리우드에 대해 너무 나쁘게 말하고 다니기 때문에".

크로는 그렇게 늘 헐리우드의 그늘에만 머물 것 같던 배우였다. 그러나 그는 예상을 뒤엎고 리들리 스코트의 서사극 <글래디에이터>에서 로마를 구하는 영웅이 되었다. 갈대의 촉감을 느끼며 고향을 추억하는 장군 막시무스는 익숙한 헐리우드 영웅들과 약간 다르다. 강간당한 채 밧줄에 매달려 죽은 아내를 보며 흐느끼는 그에게서는 '인간'의 모습이 묻어난다.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죽은 가족을 잊지 못하기 때문에 복수를 해야만 하는 막시무스. 공주와 로마를 모두 가지는 대신 먼지가 날리는 검투장 바닥에서 죽어 간 그는 소원대로 가족을 만날 것이다.

<글래디에이터>가 개봉한 후 미국의 언론은 "연기를 하는 액션배우"가 나타났다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또 다르다. 다음 작품으로 조디 포스터의 <서양 자두>를 택한 크로는 "반은 야수이고 반은 인간인" 서커스 차력사를 연기할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경계와 그것을 뚫고 나오려는 본능 사이에 서 있는 것 같은 배우 러셀 크로에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역할이 있을까.

김현정(parady@film2.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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