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허준' 에 가린 괜찮은 드라마 2편

  • 입력 2000년 6월 6일 20시 16분


시청률 5%대. 방송드라마로서는 치명적인 상처지만 동시에 그 분명한 한계상황에 대한 자의식 때문에 자기만의 빛깔을 발하도록 하는 역설적인 수치인지도 모른다.

월화드라마 시장을 7개월째 석권한 MBC의 ‘허준’의 눈부신 성공에 빛이 가린 KBS2의 ‘바보같은 사랑’과 SBS의 ‘도둑의 딸’은 참 괜찮은, 그래서 더욱 아까운 드라마다.

전체 16부작 중 이미 14부까지 방영된 ‘바보같은 사랑’은 그 막바지를 향해 치달으면서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우리 드라마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게 부자 얘기는 쏙 뺀 채 소외된 서민의 삶을 붙잡고 해부용 메스를 들이대듯 집요하게 사랑의 누추함과 그 이율배반적 모습을 담아낸 이 드라마를 보노라면 양희은의 노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가 절로 떠오른다.

이 드라마의 미덕은 기존 드라마의 ABC공식을 철저히 깼다는 데 있다. 주인공들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미싱사나 나이트클럽 종업원이고 스토리는 간통사건 조서를 보듯 궁상맞기 그지없다. 그래서 주인공 옥희(배종옥 분)가 술취한 남편에게 분풀이로 얻어맞고 달동네 계단을 한발 한발 힘겹게 내려오는 장면만큼 유부남인 상우(이재룡)와 함께 달아날 꿈에 부푼 모습조차 가슴속 편린들을 불편하게 일으켜 세운다.

하지만 그 고통스럽고 신산한 삶이 정말 우리의 삶이 아닐까. 보기 좋게 각색된 삶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생채기를 부여잡고 구질구질한 삶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우리네 대부분의 진짜 인생이다.

이제 막 시작한 ‘도둑의 딸’ 역시 소외된 사람들의 거짓없는 삶을 다루고 있다. 극중 명선(김원희)이 CD 두장을 훔치다 붙잡힌 뒤 ‘병든 여동생에게 선물해주기 위해 훔쳤다’며 용서를 비는 고등학생을 인정사정없이 경찰서에 넘기는 장면은 보기에 거북하다. 그 학생은 결국 절도품목이 20가지도 넘고 병든 여동생도 없다는 것은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의 비루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둑의 딸’의 장점은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들여다본 우리의 삶에서 코믹성과 페이소스를 포착한다는 점이다.

역설적이게도 ‘허준’의 또다른 미덕은 시청률의 황무지로 만든 월화드라마의 밭에 리얼리즘의 씨앗을 뿌렸다는 데 있다.

<권재현기자>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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