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들어봤으되 배창호가 어떤 감독인 줄 모르는 20대에게 그가 1980년대에 ‘적도의 꽃’(1983년),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으로 3년 연속 흥행 1위를 기록했고 비평적 찬사와 관객의 사랑을 동시에 누린 대단한 감독이었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90년대 들어서도 2, 3년에 한 편 꼴로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온 그의 15번째 영화 ‘정’이 17일 개봉된다.
그가 80년대 주류 영화계의 상징이었다면 90년대를 통과해온 지금, 그는 마치 독립영화 감독같다. ‘투자자에 휘둘리기 싫어서’ ‘러브스토리’(1996)부터 독립 제작방식을 선택한 그는 자금 조달이 어려워 세 번이나 제작을 중단하는 난산(難産) 끝에 ‘정’을 세상에 내놓았다.
“14년전 ‘황진이’를 만들 때 굴곡많은 여성의 삶을 너무 관념적으로 푼 것 같아, ‘정’이라는 제목으로 생활 속에 육화된 여인의 삶을 다시 다뤄보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민족 원형질의 정서는 ‘한(恨)’보다, 그것을 극복하는 힘인 ‘정(情)’에 더 가깝지 않을까?”
‘정’은 1910∼60년을 배경으로 한많은 여인의 삶을 그린 영화. 혹독한 시집살이 등 주인공 순이가 겪는 모진 풍상은 자연스레 어머니, 할머니 세대의 삶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그동안 너무 많이 다뤄져 어쩌면 진부하기까지 한 소재가 아닌가.
“평범한 이야기를 어떻게 미학적으로 다루고 새롭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 수많은 동서양 화가들이 여인의 초상화를 그려왔지만 또 그린다고 진부한가? 문제는 낡은 방식이냐, 생명력있게 그리느냐의 차이다.”
주인공 순이 역을 맡은 배우 김유미는 배감독의 아내. ‘러브스토리’ 때도 주연을 맡았던 김유미는 시대극을 만들겠다는 남편의 얘기를 듣고 다시는 연기를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머리를 잘라버렸지만 결국 가발을 쓰고 연기를 해야 했다.
“처음부터 김유미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 기성배우의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친근감있는 무채색의 이미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와 무관한 배우로 봐줬으면 좋겠다.” 그는 “내 눈에 콩깍지가 껴서 마누라를 너무 예쁘게 보고 제작비 10억원이 넘는 영화를 만들었겠느냐”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같은 비판적 사실주의 계열에서 ‘깊고 푸른 밤’같은 사회심리 드라마까지 80년대 그의 성공비결은 동시대 젊은이들의 감성에 적중하는 감식안이었다. 그는 속도 빠른 2000년에 오히려 튈 만큼 느리고 조용한 ‘정’에도 동시대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당연하다. 80년대에 만든 영화들은 짧은 침을 여러 곳에 찔러보는 식이었다면 ‘정’은 굵은 침을 깊이 놓는 것과 같다. 그 침이 닿는 깊숙한 곳에는 이런 영화에 공감하는 감수성이 있을 것이다. 신세대라도 피자, 햄버거뿐만 아니라 된장찌개도 먹으며 살지 않느냐.”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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