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터뷰]<와호장룡>리안감독 "무협세계에 비친 아이러니"

  • 입력 2000년 8월 17일 19시 06분


리안(李安)감독이 만들면 무협영화도 뭔가 다르다. 중국을 무대로 한 대작 ‘와호장룡’(19일 개봉)은 배우들이 하늘을 휙휙 날고 벽을 타고 오르내리며 발레같은 액션을 선보여도 적막한 슬픔과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성인용 무협’영화다.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을 잇따라 안겨준 ‘결혼피로연’(1994)과 ‘센스 앤 센서빌러티’(1995), 영미권 감독보다 훨씬 냉정하게 미국 중산층 가족의 황폐한 일상을 묘사한 ‘아이스 스톰’(1997)등 주로 가족을 소재로 삼아 정교하고 리드미컬한 드라마 구성력을 보여온 리안 감독. 그런 그가 무협영화라니…. 다소 의외라는 기자의 질문에 지난달말 방한했던 그는 “베스킨 라빈스에 들어가 31가지 아이스크림 중 뭘 먹을까를 고민하듯 무협영화도 해보고 싶었을 뿐”이라며 재치있게 받아 넘겼다.

“무협지를 읽으며 자라서인지 무협영화 만들기는 내 오래된 꿈이다. ‘와호장룡’에서 무술은 싸움이라기보다 영화적 언어다. 속도에 의존하는 홍콩 액션보다 아름다운 선을 중시하는 중국 경극의 전통을 따라 액션 장면을 뮤지컬처럼 만들고 싶었다.”

‘와호장룡’에서 저운룬파(周潤發)가 연기한 무림의 고수 리무바이는 “떨치지 못하는 깊은 상념 때문에 강호를 떠나겠다”고 한다. 그의 높은 내공도 깊은 슬픔을 다스리기엔 역부족이었으며, 사랑하는 리무바이와 수련(양쯔충·楊紫瓊)은 맺어지지 못한다. 강호의 검객을 꿈꾸던 용(장쯔이·章子怡) 역시 엇갈리는 인연 속에서 헤매다 꿈을 이루지 못한다. 요컨대 ‘와호장룡’은 무엇 하나 이뤄지는 것이 없는 이상한 영화다. 리안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영화에서 리무바이는 휘청거리는 나뭇가지 위에서도 의연할 정도로 무술세계에서는 최고 경지에 올랐지만 인생의 무거운 번민 앞에서는 어쩌지 못했다. 그가 키워온 내적인 힘이 그의 인간적 고뇌를 해결하는 데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어쩔 수 없음, 누구나 살면서 느끼게 될 인생의 아이러니를 환상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대만 출신인 그는 할리우드에 가장 성공적으로 진출한 동양 감독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대만, 중국 등과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며 느낀 가장 큰 차이에 대해 묻자 그는 곧장 “시스템”이라고 대답했다.

“중국과 대만에서 감독은 모든 분야에 대해 다 알아야 하고 모두를 독려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할리우드에서 감독은 영감을 제시하기만 하면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인 스탭들이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발휘해 영화를 만든다. 할리우드 영화는 대개 ‘감독의 영화’라기 보다 ‘시스템의 영화’인 경우가 많다.”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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