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기획]히로시마 애니메이션 축제

  • 입력 2000년 8월 27일 12시 02분


◀ 히로시마 페스티벌의 상징 캐릭터인 래피

히로시마 페스티벌은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평일과는 조금 다른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 주말을 맞아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가 함께 오는 것을 감안해 깊이 있는 기획전 보다는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 '세계 걸작선' 등 편하고 대중적인 애니메이션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토요일인 셋째 날도 마찬가지여서 작가의 회고전이나 세미나 없이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짜여졌다. 부모의 손을 잡고 이른 아침부터 아스텔 플라자를 찾은 아이들로 인해 이 날만은 한국의 애니메이션 행사장과 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행사장 벽에 붙은 각종 애니메이션 포스터▶

물론 이 날 프로그램을 이렇게 짠 데는 주최측에서 참가한 작가들을 야외 피크닉에 초대했기 때문에 필수진행요원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행사장 안에 없다는 이유도 있다. 전세계에 수많은 영화나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이 있지만, 아마 작가를 가장 대접하는 행사로는 히로시마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것이라는 것이 이곳에 모인 작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 애니맥스의 전시 부스

국제적인 지명도나 유명세에 따라 대접이 달라지거나, 아니면 우리처럼 정부인사나 업계실력자의 일정 위주로 행사를 꾸미지도 않는다. 작품을 출품한 작가라면 그가 대학 재학중인 학생이든, 아니면 30년 이상 애니메이션에 종사한 거장이든 동등하게 대접하는 것이 이곳 히로시마 페스티벌의 특징이다. 행사장 안에 있는 호텔에 숙소를 제공하고 해당 작품이 상영되면 반드시 관객에게 작가를 소개하는등 이곳의 '작가에 대한 예우'는 확실하다. 단지 '예우' 뿐만 아니라 경쟁 시사 다음날 전날 공개한 작품들의 작가 인터뷰를 반드시 마련한다던가, 개인 프로필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배포하는 등 보도진에 대한 '작가 알리기'도 각별하다.

마니아들이 눈길을 가장 많이 끈 서적 판매 부스▶

토요일이 되면서 가장 바빠진 곳은 행사 기념품을 파는 매장. 다른 페스티벌에 비해서는 옹색할 정도로 조그만 규모지만, 그래도 페스티벌의 마스코트인 '래피'를 비롯한 다양한 상품이 아기자기하게 구비돼 있다. 특히 한켠에는 일반 매장에서는 쉽게 구하기 힘든 애니메이션 관련 서적이나 단편 애니메이션 비디오를 판매하는데, 우리 돈으로 책 한 권에 6만원이 넘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마니아들의 자료에 대한 열망은 대단해 라울 세르베의 비디오 테이프나 일본 소화시대 애니메이션 전집 같은 것은 매장에 내놓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특히 러시아 애니메이션의 거장으로 일본에서 특히 인기가 높은 유리 놀시타인의 화집은 매장에 전시한지 한 시간도 안돼 매진될 정도로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기획 프로그램이 평이해 이 날은 그동안 미뤘던 페스티벌 전시회를 둘러보았다. 이번 페스티벌에는 동양과 서양의 인형 애니메이션을 비교할 수 있는 전시회가 있었다. 우선 발길이 닿은 곳은 영국 작가팀 '맥키논 앤 사운더즈(Mackinnon & Saunders)'의 전시회였다. 맥키논앤 사운더즈는 영국의 조그만 인형 애니메이션 전문 회사이다. 영국의 인형 애니메이션하면 우리는 얼른 아드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맥키논과 사운더즈 역시, 역사와 그동안의 성과를 따지면, 아드만 못지않은 세계 정상급의 프로덕션이다. 일반에게 많이 알려진 작품으로는 히로시마와 안시를 비롯한 국제 페스티벌에서 수상한 <샌드맨>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팀 버튼 감독의 영화 <화성침공>에 등장하는 화성인들이 이 프로덕션의 작품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이해가 빠를 것이다.

◀ 맥키논 앤 사운더즈의 전시장 입구를 장식한 <화성침공>의 인형

약 20평 남짓한 전시장 규모는 아담하다기 보다 옹색한 인상마저 줄 정도로 좁았지만, 입구에 위풍당당하게 전시하고 있는 <화성침공>의 인형들은 이들이 갖고 있는 자신감을 무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장 안에는 이 프로덕션 최대 히트작 <샌드맨>을 비롯해 이번에 경쟁 부문에 출품한 <페리위그-메이커>의 인형까지 그동안 만든 작품들의 '인형 배우'들이 전시돼 있었다. '노 스트링(No Strings)'이라는 전시회의 부제에서 보듯 줄에 매달아 움직이는 유럽의 유서깊은 마리오네트 문화에 뿌리를 둔 이 프로덕션의 특징은 조금은 그로데스크 하면서도 유니크한 매력이 넘친다는 것. 예쁘고 귀여운 캐릭터도 있기는 하지만, <샌드맨>이나 <페리위그-메이커>처럼 중세 고딕(Gothic) 분위기가 물씬 나는 음산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는 맥키논 앤 사운더즈의 전매특허이다.

화려함이 돋보이는 맥키논 앤 사운더즈의 전시실 옆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큰 족적을 남긴 모치나가 타다히토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인 모치나가 타다히토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여명기인 40년대부터 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인형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많은 작품과 후진을 길러낸 인물이다. 특히 45년 중국으로 건너가 수묵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한 상하이 스튜디오를 설립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이후에도 중국과의 많은 작업을 통해 <목적>의 터웨이 형제 등과 교류를 했던 아시아 애니메이션의 거목이다. 지난 98년 7회 페스티벌 때 8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년같은 밝은 표정으로 나타났던 그는 이듬해인 99년 세상을 떠났다.

이날 가장 많은 갈채와 찬사를 받아 국내 작품중 첫 국제대회 입상을 기대하게 만든 <존재> ▶

전시장에는 그의 손때가 묻은 콘티 노트에서 스토리 보드, 펜 등 창작도구들과 대표작의 인형들이 전시돼 있었다. 한 가운데에는 그가 제작한 인형 애니메이션의 세트를 그대로 재현해 그 중 전시장 한켠에 있는 '코부토리'는 우리나라의 전래동화로 알려져 있는 '혹부리 영감'이 있어 "이것마저...."라는 생각에 잠시 입맛이 씁쓸해지기도 했다.

셋째날에도 어김없이 경쟁부문 시사는 계속됐다. 이 날은 히로시마 경쟁 본선에 오른 우리나라의 또 다른 작품 <존재>가 상영되는 날이라 더욱 관심이 컸다. 작가의 개성이 워낙 강했던 둘째 날과는 달리 이날은 토요일의 특성을 감안한 작품배열인 듯 이야기 솜씨가 탁월한 작품들이 많았다. 특히 할머니나 아버지, 또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았는데 노르웨이 작가 토릴 코브의 <나의 할머니는 왕의 셔츠를 다림질했다>는 깔끔한 그림체에 잔잔한 유머, 그리고 할머니에 대한 작가의 한없는 존경과 사랑이 배어나 많은 갈채를 받았다. 프랑스의 콘스탄틴 캄스키는 실사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으로 자유에 대한 갈망을 그린 <미그래이션즈>를, 히로시마 페스티벌의 단골 손님 중 하나인 파스칼 느 노트는 미국 TV 시리즈 을 연상시키는 인형 애니메이션 <힐탑 병원>을 출품했다.

▲ 맥키논 앤 사운더즈의 대표작 <샌드맨>▲타다히로 모치나가 회고전이 열린 전시실 입구

▲타다히로 모치나가의 작품 세트를 그대로 전시한 모습▲타다히로 모치나가 전시실 모습

▲낙원을 찾는 쥐들의 모습과 허탈한 마지막 반전이 강한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는 <터미널-파라다이스>▲이번 페스티벌 경쟁 부문에 출품된 맥키논 앤 사운더즈의 <페리위그-메이커>의 인형

애니메이션에서 조금은 낯선 나라인 포르투갈의 호세 미구엘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더 서스펙트>란 인형 애니메이션을 출품했다. 개성이 넘치는 캐릭터와 시종일관 긴장과 서스펜스를 유지하는 이야기 솜씨, 그리고 막판의 반전이 완숙한 작품이었다. 영국 애니메이션의 거장 봅 고드프리는 밀레니엄을 맞아 영국이 걸어온 역사를 비틀어 묘사한 <밀레니엄-더 뮤지컬>이란 작품을 오랜만에 발표했다. 현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블랙유머로 유명한 작가답게 이 애니메이션에서도 1066년 이래 영국의 역사를 때로는 거의 조롱에 가까울 정도로 비꼬았다. 그의 화두는 간단했다. '그리 자랑스럽지많은 않은 제국주의이다.'

이날 경쟁부문 시사에서 뭐니뭐니해도 가장 화제와 갈채를 받은 작품은 한국의 <존재>였다. 집에서 쫓겨난 고양이와 이를 위로하는 개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곳곳에 숨겨진 익살과 재치, 그리고 개성이 넘친 캐릭터가 관객들을 시작부터 폭소 도가니로 몰고 갔다. 상영이 끝난 후 ASIFA 회장인 미셀 오셀로는 직접 제작자인 이명하씨를 찾아와 "브릴리언트"란 단어를 연발하며 격찬을 했고, 그전까지 그에게 거의 무관심했던 일본 기자들도 뒤늦게 이명하씨의 사진을 찍는등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전날의 <아빠하고 나하고>와 함께 관객들의 높은 호응을 얻은 <존재>는 벌써 '본상이나 관객상을 수상하지 않을까'라는 성급한 기대마저 낳았다. 주최국이면서도 평이한 작품으로 큰 눈길을 끌지못한 일본과는 달리 그동안 히로시마 페스티벌에서 구경꾼에 머물러 있던 한국 애니메이션이 신세대 작가들에 의해 새롭게 위상이 정립된 유쾌한 날이었다.

김재범<동아닷컴 기자>oldfield@donga.com

▲ 막판의 반전이 인상적인 포르투칼의 인형 애니메이션 <더 서스펙트>▲동물인형의 병원활동이 너무나 귀여운 <힐탑 병원>

▲ 탁월한 컴퓨터 그래픽 영상을 보여준 <미그래이션즈>▲잔잔한 유머와 친근감 넘친 그림체가 호평을 받은 <나의 할머니는 왕의 셔츠를 다림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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