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기획]히로시마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현지리포트(4)

  • 입력 2000년 8월 28일 13시 21분


넷째날, 한국어 통역 없는 히로시마 페스티벌 유감.

히로시마 페스티벌도 서서히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일요일을 맞아 행사장에는 부모의 손을 잡고 온 아이들을 비롯해 많은 관람객들로 북적거렸다.

◀ 경쟁부문 참가자들의 기자회견

이날 오전 기획 프로그램은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무라티와 사로리>. 얼핏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다큐를 연상케 하는 이름이지만, 20년대부터 60년대까지 독일 애니메이션의 역사와 작가들을 조명한 작품이다. 독일 애니메이션은 우리에게 상업용 장편이 거의 소개되지 않아 친숙하지 않지만, 그 역사가 19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뿌리가 깊다.

감독 게라드 곡켈은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20년대 무성 애니메이션에서 나치의 치하를 거쳐 60년대에 이르기까지 독일 애니메이션의 발자취를 짚었다. 특히 오스카 피싱거와 발터 루트만, 피터 자흐, 루돌프 페닝거 등 오늘의 독일 애니메이션을 있게 한 거장들의 작품세계를 진귀한 영상자료와 인터뷰로 소개했다. 전체적인 진행과 인터뷰를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과 사진 픽실레이션으로 꾸며 다큐멘터리 자체가 훌륭한 애니메이션 작품이었다.

<존재>로 주목을 받은 한국의 이명하 감독 ▶

매일 오전 11시에는 경쟁부문에 소개된 작가들의 기자회견이 프레스룸에서 열리는데, 이 날은 전날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은 이명하 감독이 나올 예정이어서 기대가 컸다. 하지만 이날 기자회견장에서는 주최측의 무성의한 태도로 유쾌하지 못한 장면이 연출됐다.

미국과 캐나다, 독일 작가들과 함께 기자회견에 나온 이명하 감독은 한국말로 인터뷰를 하려고 했으나 한국어를 통역할 진행요원이 전혀 없었다. 영어가 서툰 러시아나 동구 유럽 작가들의 경우 그에 맞는 통역을 붙여주는 등 치밀한 진행을 해온 페스티벌 사무국이 한국어 통역을 기자회견에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은 실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한심한 상황. 한국에서 거의 4백여명에 가까운 관람객이 왔고, 본선에 두 작품이 오른 상황에서 사무국에 한국어 통역요원 하나 없었다는 것은 주최측이 한국작가나 관람객을 어떻게 대하는지 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 페스티벌의 데일리 소식지 '래피 뉴스'

더욱 웃긴 것은 프로그램 디렉터 사요코 기노시타의 태도. 그녀는 이명하 감독이 영어가 서툴러 한국어로 인터뷰를 말하려고 하자, 신경질적인 태도로 "그러면 내일 다시 기자회견에 나오라"고 말했다. 다행히 회견장에 있던 한국학생이 통역을 자원해 기자회견을 마칠 수 있었지만, 뒷맛이 개운치는 않았다.

오후에는 두 명의 작가에 대한 특별전이 상영됐다. 한 명은 회고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모치나가 타다히로의 작품전이었고, 다른 한 명은 이번 대회 심사위원중 한 명인 폴 데누어의 작품전이었다. 인형 애니메이션에서 일본과 중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모치나가는 이미 전시회 소개 때 언급한 바 있다. 그의 애니메이션은 현란한 기교나 실험정신, 화려한 영상은 없지만 일본 민담이나 설화를 바탕으로 한 인간미가 물씬 넘쳤다.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한 소프트웨어 전시공간 ▶

반면 폴 데누어의 기획전은 파격적인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상영이었다. 실사나 사진을 이용해 주로 픽실레이션 기법으로 제작하는 그의 애니메이션에서 주된 소재는 인간의 소외와 대화 단절. 유연하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펼치는 스타일이라기보다는 다소 과격할 정도로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전달해 잔재미는 없었다. 하지만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경계를 허무는 과감한 실험정신은 돋보였다.

오후 6시30분부터는 4일간 열리는 경쟁부문의 마지막 상영이 있었다. 첫 문을 연 <백치들의 마을>은 금년 전주 영화제에서 공개돼 호평을 받았던 작품.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페스티벌의 강력한 그랑프리 후보인 <노인과 바다>나 <하루가 시작할 때>보다 이 작품을 더 높게 평가했다.

◀ 경쟁부문이 끝난 후 로비

평범한 시골의 한 농부가 갑작스런 충동으로 가출했다가 귀가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를 연상시킬 정도로 구수한 정서와 해학, 서정이 돋보였다. 펜슬 스케치의 그림에서 컷-아웃, 오브제, 클레이메이션 등 온갖 기법과 다양한 카메라 앵글이 정신없이 구사돼 기술적인 완성도에서도 최상급이었다.

크리스 웨지의 <바니>는 정교한 디지털 기술이 돋보였다. 특히 토끼의 털과 수염등의 묘사는 픽사 스튜디오의 <스튜어트 리틀>과 맞먹을 정도로 탁월했다. 다만 이야기의 구조가 다소 약한 것이 흠.

영국의 여류작가 베라 노버어의 <라 루나>는 <당근들의 밤>과 함께 이번 페스티벌 최대의 '문제작'이 될 애니메이션이었다. 털실로 제작한 쥐 인형들을 등장시킨 이 작품은 보수적인 가부장제와 가족 공동체의 붕괴를 섬뜩한 비유로 묘사했는데, 털실 인형임을 감안해도 너무나 엽기적인 영상 때문에 관객들이 경악했다. 덕분에 작가가 소개될 때 히로시마 페스티벌에서는 드물게 객석에서 작은 야유가 나왔다.

NFB 포스터를 비롯한 이번 페스티벌이 참가 작품 포스터 ▶

<장화 신은 고양이>를 비롯해 클레이메이션계에서 세계적인 작가로 꼽히는 게리 바르딘은 이번에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배경으로 종이 오브제를 이용한 <아다지오>란 작품을 출품했다. 음악의 비감한 선율을 완벽하게 아우르면서 단순한 배경과 추상화된 종이 캐릭터를 등장시킨 그의 작품은 마치 독일 애니메이션을 보듯 다분히 철학적이었다.

경쟁부문의 마지막은 아기자기한 개그가 돋보인 <지구의 끝에서>가 장식했다. 산 정상에 있는 집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상황이 과격하지 않으면서도 경쾌한 익살로 묘사됐다. <지구의 끝에서>를 마지막으로 4일간 58편이 선보인 경쟁부문의 공개시사가 끝났고, 결과는 28일 오후에 발표될 예정이다.

▲ 슬라브 특유의 서정과 해학을 완벽한 기술로 묘사한 수작 <백치들의 마을>▲ <당근들의 밤>과 함께 이번 페스티벌의 또 하나의 문제작으로 꼽힌 <라 루나>
▲ 픽사 스튜디오의 <스튜어트 리틀>과 맞먹는 섬세한 컴퓨터 그래픽의 <바니>▲ 깔끔하면서도 미술적으로 안정된 구도가 돋보였던 <부서진 인형>
▲ 알비노니의 아다지오에 이보다 낳은 비디오 클립은 없을 것 같은 <아다지오>▲ 경쟁 부문의 마지막을 유쾌한 폭소로 장식한 <지구의 끝에서>
▲ 모치나가 타다히로의 56년작 <다섯마리의 꼬마 원숭이>▲ 이번 페스티벌 심사위원인 폴 데누어의 <아무도 나를 모른다>
▲ 제 5회 히로시마 페스티벌 경쟁 본선에 올랐던 폴 데누어의 <스톱 모션 페이시즈>▲ 이번 페스티벌에서 만난 유일한 중국 작품 <보연등>

한편 첫날부터 대규모 참관단으로 화제가 된 한국 관람객은 지난 25일과 26일 대학의 애니메이션 관련 학과가 단체로 참여하면서 더욱 수가 늘어났다.

눈에 띄는 것은 단지 숫자만이 아니었다. 지난 98년 7회 페스티벌 때도 많은 관람객들이 한국에서 왔지만 페스티벌 관람은 뒷전이고 관광과 전자제품 쇼핑으로 그리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비록 복장이나 헤어 스타일은 일본인들보다 더 자유분방했어도 각종 기획전이나 경쟁 부문 상영에 빠짐없이 참가해 몰두하는 진지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다만 아쉽다면 행사장에서 가끔 일부 학생들이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는등 공공장소에서의 기본적인 에티켓을 무시한다거나 단체로 몰려 다니면서 너무 소란스럽다는 것.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 oldfie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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