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 '컴백공연'을 보고]'소리의 혁명가'로 그가 돌아왔다

  • 입력 2000년 9월 13일 18시 57분


서태지가 몰고 온 소외된 젊은이들의 외침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사회적 그룹’의 출현을 보았다. 이 그룹은 물론 기존그룹도 아니며 거기에 저항하는 그룹도 아니다. 편의상 기존그룹과 그 대항그룹을 우와 좌라고 한다면 서태지와 맥을 같이 하는 ‘제3그룹’은 좌우 그룹과 별도의 룰을 갖는다.

서태지를 단순히 X세대의 부상을 알린 존재로 규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세대의식이 무뎌진 지금에도 왜 서태지 컴백열풍이 부는가. 그것은 언제나 변함 없이 존재하는 소외된 젊은 세대의 압도적 지지 때문이다. 과거에 이들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서태지와 함께 이들은 외치기 시작했다. 교실의 열등생들이 당당히 자기주장을 폈고, 거리에서의 행동도 거칠어졌다.

이들은 가만히 두면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지만 건드리면 용수철이 튀기듯 즉각적으로 반발한다. “지난 1996년 은퇴선언은 철없는 행동이었지만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사과하고 싶지 않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과한다”는 서태지의 TV 인터뷰에서 이 제3그룹의식의 단편을 읽을 수 있다. 서태지는 그래서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이들의 대변인이 됐다. 소외당하고 사는 사람들의 사회적 리더가 된 것이다. 그들에게 서태지는 꿈과 희망의 상징이다. 신곡 ‘인터넷 전쟁’의 가사처럼 그가 ‘그들을 지켜주고 가슴을 찢어주며 눈물을 닦아준다’.

◇ 볼륨 극대화한 하드코어로 무장

서태지는 단 한번도 지배그룹형의 음악을 택한 적이 없다. 그가 퍼뜨린 랩, 헤비메탈, 얼터너티브 록, 펑크, 갱스터 랩은 한마디로 ‘아버지가 싫어하는 모든 음악들’이다. 이번의 선택인 하드코어는 더 나아가 메탈, 펑크, 랩 등 본래 소란스런 음악이 교배를 통해 볼륨과 스피드를 극대화한 초강성 굉음이다. 지난 12일 방영된 MBC ‘컴백 스페셜 서태지’ 프로그램은 그가 왜 이번에 광기의 음악인 하드코어를 들고 나왔는지 여실히 말해준다. 거기서 음악팬들은 모처럼 현란한 춤이 아닌 통렬한 ‘악기소리’를 들었고 가수의 사나운 포효를 목격했다.

팬들은 ‘이제 가요스타일이 변해야 한다’고 간절히 소망했고 서태지는 그 기대에 부응했다. 공연은 틴에이저의 설익은 감각에 의존하는 애교형 댄스와 발라드 가요 천지에 사운드혁명의 깃대를 꽂는 일대 도발의 현장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음악 판에 천편일률의 기획상품들을 쏟아낸 ‘음반산업’에 대한 ‘음악인’의 린치였다. 어쩌면 하드코어는 그에게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필연과 당위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한 서태지의 열성 팬은 감격한 나머지 “이제 소리의 새날이 밝는다”고 했다.

음반판매량이 그래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으로 가요 흐름의 변화 여부를 탐지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 컴백 임팩트가 발효중인 시점이라 분위기는 좋지만 그래도 ‘백만장 신화’의 확대재생산을 장담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하드코어가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포괄할 음악은 못되기에 그렇다. 물론 목표가 다른 서태지에게 음반판매량이 중요하지 않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럴 위치에 있지 않다. 대중성을 의식하지 않은 음악으로 대중성을 포획해야 하는 참으로 모순된 상황이다. 그가 만약 나머지 한 마리 토끼도 잡는다면 당연히 국내 가요계의 첫 밀레니엄 쾌거가 된다.

◇ 음악적 아이디어는 예전만 못해

서태지의 재기는 여전히 살아있다. 신보에 수록된 곡 ‘탱크’는 보코더를 통한 보컬 변조 부분의 매력으로 하드코어라 할지라도 귀에 잘 들려온다. 전체적으로 하드코어에 요구되는 강한 보컬파워를 살리기 위해 기술적 효과를 덧입혀 성량의 약점도 커버했다. 어떤 서구의 장르를 실험해도 자신의 창조성을 발휘하는 그답게 ‘서태지음악’을 주조하는데 성공했다. 벌써부터 표절의혹이 나오고 있지만 설령 그릇이 미국 하드코어 그룹인 ‘콘’이나 ‘림프 비즈킷’일지는 몰라도 안의 내용물은 명백히 서태지의 것이다.

허나 ‘사운드를 얻은 대신 곡이 없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그는 데뷔이래 음악을 만들어내는 아이디어에 관한 한 가히 천재로 통해왔다. ‘난 알아요’ ‘하여가’ ‘교실이데아’ ‘필승’ 등은 정말 가요사에 획을 그은 절묘한 곡들이다. 하지만 음악관계자들 가운데 더러는 새 앨범을 듣고 ‘그의 아이디어가 이미 소진된 것 아니냐’고 실망하는 빛이 역력하다. 이름이 갖는 파괴력에 음악적 소구력이 결합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지적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 소외된 젊음의 영원한 '울트라맨'

그러나 이것은 예전 서태지와 지금 서태지의 비교일 뿐이다. 지금 서태지와 지금 국내 인기가수들로 비교대상을 옮기면 관점은 전혀 달라진다. 현재 우리에게 소외층의 의식을 담보하는 가수들은 없다.

다시 서태지는 고통으로 숨막힌 젊음을 집결시키면서 새 그룹의 깃발을 들어올린다. 그들에게 서태지 음악은 부동의 최고봉이다. 서태지는 그 제3그룹을 다른 기존의 그룹들과 대등한 주체로 만들었다. 그는 그들하고만 얘기하려고 한다. 다른 층이 볼 때는 멀어져버린 존재지만 그는 소외된 젊은이들의 영원한 지도자요, 울트라맨이다.

임진모(음악평론가) jjinmo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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