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영화가 지니는 이같은 매력 덕분에 우리는 심심찮게 영화속 재판의 방청객이 된다. 그러나 영화 속의 법정은 현실의 법정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영화배우 박신양씨(32)는 요즘 한달이 넘게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을 들락거리며 법정영화 ‘인디안 섬머’ 촬영 준비작업으로 분주하다. 법조인들의 세계에 푹 빠져보는 경험을 통해 관객들에게 ‘진짜’ 법정을 보여주고자 하는 박씨의 의미있는 시도다. 28일 촬영에 들어간 이 영화는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한 여인을 돕는 젊은 변호사의 이야기.
“피고인이 변호사를 접견할 때 보통은 수갑을 차지 않아요. 여자 주인공이 수갑을 찬 채 접견실로 들어오는 장면은 고쳤으면 좋겠군. 인권 차원에서도 문제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에요.”
“대법원 상고심에서는 증인이나 변호사가 출석하지 않아요. 1,2심 과정에서 올라온 기록만을 토대로 대법관들이 판결을 내리지. 그러니까 대법원 법정에 변호사가 나오는 장면은 어색합니다.”
8월의 늦은 저녁 서초동의 한 까페. 자잘한 대사 하나까지 검증받겠다며 두꺼운 대본을 들고 찾아온 박씨를 상대로 서울지법 형사합의부 김대휘 부장판사(44)의 ‘강의’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는 한숨을 쉬는 편이 낫다든지 저 부분에서는 격렬한 몸짓이 필요할 것 같다는 영화적 요소까지 곁들여졌다. 논리적 법관이 조금씩 감성적 시나리오 작가가 돼 가는 순간이다. 한 문장 한 문장 고쳐 내려가는 판사의 손끝을 참을성있게 따라가던 영화배우 마침내 지친 한마디. “시나리오를 재판기록처럼 읽으시는군요.”
그러나 법률 전문용어를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렵다며 필기구에 녹음기까지 완전무장한 박씨의 ‘결연한’ 수업태도도 만만치 않다. 법과 관련된 것이면 무엇이든 알고 싶다며 이날 박씨가 준비했다는 질문만 100여개. 무죄추정의 원칙과 감경사유, 범죄 종류와 사형제 논란 등등의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김 판사의 ‘형법 개론’ 강의를 들으며 점점 더 진지해지는 박‘변호사’. 영화배우는 ‘법조인’이 돼 가고 있었다.
박씨의 고민은 실제 재판모습과 똑같이 보여주자니 밋밋할 것 같고 극적으로 만들자니 현실과는 많이 다를 것 같은 점.
“움직임이 거의 없는 변호사들의 신문태도가 너무 단조롭게 보이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
“배심원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극적인 제스처를 많이 사용하는 미국의 변호사와는 달리 한국 변호사들은 ‘서면주의’에 따라 한 자리에서 서류만 읽어내려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구두변론을 해도 상관없지만 시간제약이 많아서 대부분 시도하지 않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좀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괜찮습니다.”
미국 법정영화에 익숙한 사람들이 변호사나 재판 등에 대해 의외로 많은 편견과 환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된 의견. 그렇다면 영화속 변호사가 바라보는 영화밖 법조인들의 세계는 과연 어떤 것일까.
“변호사들은 왜 항상 법정에서 재판장에게 허리가 휠 정도로 인사를 합니까? 판사 앞에서 당당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재판을 잘 봐달라며 재판장에게 굽신거리는 것이 아니라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법정 자체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엄숙한 법정에 대한 예의라고 할까요.”
“왜 변호사는 운동화를 신고 재판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정장 위주의 옷차림이 약간은 형식적인 것 같은데…”
“신뢰감을 주는 이미지가 변호에 유리합니다. 재판도 결국 각자가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연출되는 한 장면이라고 볼 수 있어요. 재판 도중 돌발적인 상황이 생길 때 법조인들에게 순간적인 판단력과 순발력이 요구된다는 점도 영화배우와 비슷합니다.”
공통점에 공감하는 두 사람. 영화인과 법조인의 영역을 서로 넘어들던 이들 사이에 어느덧 교감이 흐르고 있었다. 판결을 내려야 하는 법관의 고뇌와 많은 종류의 삶을 살아보는 영화인의 인생철학, 각자의 영역에서 느끼는 어려움과 보람은 이날 새롭게 쓰여진 시나리오의 소재. 법과 영화와 인생에 대한 이야기로 자정을 훌쩍 넘겨버린 판사와 영화배우의 대화는 그 자체로 한 편의 ‘법정 영화’였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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