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철학적 주제에 심취했던 그는 2000년을 전후해서 가벼움의 미학을 습득했다.
변신의 단초는 쿠바 음악가들의 일상을 좇는 디지털 다큐멘터리 <브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이었고 <밀리언 달러 호텔>은 그 변신을 체화해 나가는 과정의 영화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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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호텔에서 벌어진 백만장자 아들의 투신 자살을 시작으로, 용의자 목록에 오른 호텔 투숙객들의 면면을 흥미롭게 전해준다. 자신이 오래 전 비틀즈의 멤버였다고 주장하는 얼빠진 남자 디키, 뭔가에 넋을 놓고 다니는 것 같은 여자 엘로이즈, 좀 모자란 듯하지만 엘로이즈에 대한 사랑 만큼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깊은 남자 톰톰. 이들이 엮어 가는 범인 찾기 게임은 일견 자극적이면서도 미국의 60년대에 대한 애잔한 향수를 전해준다.
디지털 카메라와 필름을 섞어 찍은 <밀리언 달러 호텔>은 빔 벤더스다운 스타일과 빔 벤더스 답지 않은 스타일이 적절히 혼합되어 있는 영화다. 우선 빔 벤더스 영화다운 스타일은 시처럼 아름답게 직조된 주옥같은 대사들이다. 빔 벤더스 감독은 <도시의 앨리스> <베를린 천사의 시> 등에서 들려줬던 시적인 대사들을 이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들려준다.
"담배를 끊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죽거나 곧 암에 걸릴 거예요." 교조적으로 흐를 뻔한 남자 주인공 톰톰의 대사를 받아치는 여주인공의 솜씨는 수준급이다. "난 죽지 않아요. 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거든요."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뭐죠?" "전 가공의 인물이에요."
뒷머리를 잡아채는 이 아름다운 대사와 더불어 그는 영상미를 배가시키는 음악들을 적절히 삽입했다. <파리, 텍사스>에서 을씨년스러운 라이 쿠더의 기타 연주로 인간의 고독을 형상화했던 그는 이 영화에서도 여전히 영상에 힘을 보태는 음악을 들려준다.
그러나 <밀리언 달러 호텔>에서 빔 벤더스적인 스타일을 찾는 것은 또한 쉽지 않다. 멜 깁슨, 밀라 조보비치 등 할리우드 스타급 배우들의 이름이 캐스팅 리스트에 올라있는 것만 봐도 이것은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동안 그의 영화에서 스타 배우를 찾는 건 참 힘든 일이었으니까. 내용 역시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의 색깔이 완연하다. 호텔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갑부 아들의 살해 사건을 다룬 전형적인 형사물이기 때문.
그래도 빔 벤더스 감독은 몇 가지 장치를 통해 익숙한 장르의 함정에 빠질 뻔한 영화를 구제했다. 그것은 벤더스 감독이 전작에서 줄곧 고수해왔던 사회적인 풍자나 고발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밀리언 달러 호텔'은 제목에서부터 사회 고발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밀리언 달러 호텔이라고 하면 흔히 최상의 인간들이 드나드는 일류급 호텔을 연상하지만, 실제로 이 영화가 그려내는 호텔의 이미지는 그것과는 정반대다. 사회의 온갖 낙오자들과 부랑아들이 모여 사는 누추한 공간. 이른바 밀리언 달러 호텔은 정신병원이나 빈민 수용소에 가까운 이미지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밀리언 달러 호텔>은 미국이 걸어왔던 지난 반세기의 비극적인 꿈을 담은 영화다. 레이건 대통령 시대만 해도 실제 최상의 호텔로 대접받았던 밀리언 달러 호텔은 이제 버림받은 자들이 죽지 못해 사는 공간으로 변했다. 감독은 바로 이 점을 주목하고 밀리언 달러 호텔에 카메라를 들이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영화 속 호텔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상징이자 비유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아메리카 드림의 변태적이고 역설적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다"며 '밀리언 달러 호텔'이 지닌 상징성을 강조했다.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 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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