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문화 3차 개방 이후 국내 개봉 1호 애니메이션으로 기록된 <무사 쥬베이>의 감독 가와지리 요시야키는 지난 9월 내한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신작 '뱀파이어 헌터 D'가 자신에겐 세계 무대를 겨냥하고 제작한 첫 번째 애니메이션이 될 거라고 덧붙였다.
제5회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한국에 첫 선을 보인 '뱀파이어 헌터 D'는 그의 말대로 왜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무국적 애니메이션이다. 길게 뻗은 팔 다리와 큰 눈, 독특한 복장을 하고 등장하는 '뱀파이어 헌터 D'의 캐릭터들은 황인종도, 백인도 아닌 다분히 만화적인 외형을 갖췄으며, 미래세계를 배경으로 한 영화답게 사건이 일어나는 도시의 국적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뱀파이어 헌터 D'는 가와지리 요시야키 감독이 이미 <마계도시> <요수도시> 등을 만들며 인연을 맺었던 작가 기쿠치 히데유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제목에서부터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이 영화는 뱀파이어를 잡는 사냥꾼 D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은 물론 존 카펜터 감독이 연출한 <슬레이어>나 스티븐 노링턴 감독이 연출한 <블레이드>와 유사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독창성이 많이 떨어진다.
그러나 뱀파이어 사냥꾼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목록 안에 이 작품을 쉽게 분류해 버리고 마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다른 뱀파이어 영화들이 흔히 공포나 사랑, 철학적 주제라는 몇 가지 장르 요소 중 하나를 골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반해, 이 영화는 모든 장르를 혼합하면서도 결코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을 만큼 뛰어난 흡입력을 과시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사라진 딸을 찾아달라는 성주의 부탁을 받고 여행길에 오른 뱀파이어 헌터 D가 우여곡절 끝에 어둠의 도시에 숨어사는 뱀파이어의 여왕을 없애버린다는 이야기. 그러나 이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철학적 함의는 몇 마디 말로 요약되는 줄거리만큼 그렇게 간단하진 않다. '뱀파이어 헌터 D'의 캐릭터들은 생각보다 훨씬 구구 절절한 삶의 굴곡을 거쳤기 때문이다.
뱀파이어 헌터 D는 이 영화에서 철학적인 고뇌가 가장 많은 인물이다. 반은 인간이고 반은 뱀파이어인 그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인간의 삶에도, 뱀파이어의 세계에도 끼지 못하는 불운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인간의 몸으로 뱀파이어 사냥꾼이 된 여자가 D에게 "당신은 왜 뱀파이어 사냥꾼이 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내게 삶이란 없어." 인간의 삶을 살고 싶었으나 그렇게 할 수 없었던 D는 인간의 편에 선 뱀파이어 헌터가 되는 것으로 내재된 욕망을 달랬던 것이다. .
언뜻 보기에 그는 영원한 생명과 신비로운 능력을 소유한 영웅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정체성의 혼란과 인간 세상에 대한 열망을 안고 살아가는 슬픈 존재에 다름 아니다.
그밖에 영화 초반 뱀파이어의 손에 납치된 여주인공은 우리의 짐작과는 달리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인물이다. 뱀파이어를 사랑하게 된 그녀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사랑하게 된 뱀파이어 역시 괴롭긴 마찬가지다. 언뜻언뜻 여자의 가냘픈 목을 깨물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는 그는 매순간 자신의 어쩔 수 없는 본능 때문에 절망한다.
이렇듯 인간과 뱀파이어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 안에 정체성 혼란이라는 묵직한 철학적 주제를 담아낸 이 영화는, 탁월한 액션 신과 신비로운 공포감까지 충분히 소화해냈다. 가와지리 요시야키 감독의 영화답게 자극적인 폭력 장면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서늘한 공포감도 십분 살아있다. 그러나 전 세계의 다양한 연령층을 타깃으로 제작한 탓인지 요시야키 영화 특유의 에로틱한 매력은 많이 줄었다.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 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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