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에 한국어를 배우러 서울에 왔던 것을 제외하고 부산영화제는 그에게 한국에서의 첫 일터다. 로테르담 영화제에 ‘나쁜 영화’를 출품한 장선우 감독의 통역을 맡은 게 인연이 되어 부산까지 오게 됐지만 영화는 잘 모른다.
◇훌쩍 자라 돌아온 입양아◇
부산영화제를 취재하러 온 외신기자들을 상대하느라 프레스센터를 잘 비울 수가 없지만, 가끔 남포동 극장가를 가득 메운 또래의 젊은이들을 보면 그는 놀랍고 마음이 설렌다고 한다. “무엇이 저들을 이곳에 모이게 하는지, 나는 그들과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지”를 생각하곤 한다.
다행히 그에겐 버림받았다는 상처가 깊지 않다. 부산에서 가끔씩 “아, 난 외국인이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어도 아직까지 그에겐 ‘즐거운 발견’이다. 어렵사리 다시 만난 할머니에게 한국에서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소박한 기쁨이다.
천민권(23·동아대 영문과3). 96년 1회 부산영화제 이전까지만 해도 그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대학생이었다. 1회 때 우연히 남포동 PIFF광장 야외무대에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제작진이 관객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영화에 대해 토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저 현장에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던 그는 2,3회 때 주저않고 자원봉사에 나섰고 열성이 두드러져 지난해와 올해 잇따라 전산담당 스태프로 ‘발탁’됐다.
4년간 영화제 일을 했지만 그가 제대로 본 영화는 한 편도 없다. 그러나 부산에 온 영화광들이나 자신의 열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집에선 쓸데 없는 일 한다고 뭐라지만, 그는 20대 초반을 고스란히 바쳐 무언가를 정말 열심히 했다는 기억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많은 힘이 될거라고 믿는다.
◇자원봉사하다 발탁된 대학생◇
두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어둠이 짙게 깔린 PIFF광장에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영화제 카달로그를 뒤적이며 내일의 관람 일정을 짜는 젊은이들이 보인다. 내가 만난 두 20대와 이들은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을까. 영화를 사랑하건, 혹은 굳이 영화를 몰라도 좋다. 부산영화제를 통해 부쩍 자란 자신을 발견하고 뿌리를 알아가는 이들에게 이곳은 이미 삶의 배움터다.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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