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방송은 더 냉정하다. 한 10초만 보면 "좋아 좋아!"하며 50분을 투자할지, "우씨, 채널 돌려!"하고 리모콘을 찾을지 결정난다.
새로 시작한 SBS 수목드라마 <여자만세>는 단박에 재미있을 거란 '필'이 팍팍 오는 드라마다. <여자만세>의 다영(채시라)은 보통 드라마의 여주인공과는 사뭇 다르다. 전혀 주인공 같지가 않다. 적당히 예쁘고,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내숭이고, 적당히 푼수 떠는 보통의 노처녀다.
누구나 고등학교 동창 중에 꼭 한 명씩은 있을 법한 평범한 여자다. 다른 드라마라면 이런 성격의 여자들은 대개 예쁘고 잘나가는 여주인공의 화려한 연애담에 맞장구나 쳐주는 조역에 불과한데 다영이는 당당히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역이다.
어설픈 여주인공 다영이는 하는 짓도 이미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극중에서 남자 친구가 사장님 조카랑 눈이 맞았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설정? <청춘의 덫> 심은하네….'
그런데 다영이는 심은하처럼 뽀얀 얼굴에 눈 동그랗게 뜨고 비장하게 눈물 한방울 또르륵 흘리고마는 스타일이 아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돼서 울고 불고 때리고 지지고 볶고….
그야말로 온갖 추한 꼴 다 보인다. 내가 남자라도 정 떨어질 것 같은데, 왠지 그 '오버'가 밉지만은 않다. 사실 7년 사귄 남자 친구가 바람났는데 고상하게 눈물 한 방울만 흘릴 수 있는 여자, 그게 괴물 아닌가?
배신한 남자에 대한 복수도 다영이는 <청춘의 덫> 윤희와 비교하면 유치찬란이다. "널 부숴버리겠어"를 의식한 대사인지 몰라도 "믹서에 갈아버리고 싶다"고 이를 가는 다영이는 배신한 남자를 죽이는 온갖 비디오를 섭렵하며 청부살인을 상상한다.
물론 이런 여자들은 큰일 못 벌인다. 신혼여행에 따라가서 벨 누르고 도망가는 정도다(어쩌면 이런 황당한 복수를 더 무서워할 남자도 있겠지만). <청춘의 덫> 윤희가 벌레 한 마리 못 죽일 것 같은 얼굴로 저지른 일에다 대면 다영이의 복수는 정말 '귀여운 애교'이다.
회사생활 몇 년에 아직 대리도 못 달고 결혼에 목숨 걸었다고 똘똘한 여동생 서영(채림)에게 구박도 받는다. '서영아, 너두 나이 먹어 봐라. 다 관두고 시집가고 싶어질 때가 있을테니.'
일로 성공할 생각 안하고 그저 아기자기하게 가정 꾸려나갈 꿈을 꾼다고 그게 뭐 그리 큰 죄인가? 사실 온 세상 남자들도 다 야심만만하게 성공을 꿈꾸는 건 아니지 않나? 소박한 꿈이 박살난 우울한 청춘 다영이의 모습은 결혼 전 내 모습을 보는 듯, 아직 결혼 안한 친구의 모습을 보는 듯 너무나 리얼하다.
노처녀 김다영. 7,8년 후면 원미경님이 열연하는 <아줌마> 오삼숙 여사처럼 될 가능성이 농후한 여자이다. 순정을 다 바쳐 사랑했던 남자를 빼앗긴 평범한 여자 다영이가 어떻게 변신할 지 정말 기대된다.
그리고 또 하나. 새삼 우리를 경악하게 하는 것은 이제는 노처녀에서 아줌마 연기자로 처지가 바뀐 채시라의 놀라운 연기이다. '아니 이쁜 여자구 안 이쁜 여자구 아줌마는 아줌마인가?'
오랜만에 안방극장에 돌아온 채시라의 엽기적 코믹연기는, 처녀 배우들은 근접 못할 '인생의 희노애락'이 녹아있는 것이라고 할까? 사극에서 서릿발 같은 위엄을 자랑하던 대비마마 채시라가 그렇게 날렵한 이단옆차기를 선보일 줄이야….
"마마, 좀 심하게 망가지셨사오나 정말 만세, 만만세이옵니다!..."
조수영 <동아닷컴 객원기자> sudatv@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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