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밍량이 그리는 세기말 역시 크게 다르진 않다. 쉽게 말 걸지 않고 안으로만 숨는 사람들. 공원 벤치에서 10여분을 울어도 누구 하나 따라 울어주지 않는 차가운 현실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차이밍량 감독의 엄격한 시선이다.
<구멍>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여전히 지쳐있다. 이야기할 상대가 없고 몸은 아프다. 바깥에는 장대비가 내리고, 마음껏 숨을 쉬기엔 지나치게 오염된 공기가 목구멍을 막는다.
그러나 <구멍>은 이 암울한 현실에서 희망 한 줄기를 건져 올린다. 한마디로 <구멍>은 Y2K 이후 세대에 바치는 '희망의 엽서'다.
전작에서 사운드를 지극히 자제했던 차이밍량 감독은 이 영화에서 오히려 소리로 소통한다. 21세기를 며칠 앞 둔 어느 날 한 여자의 집 라디오에선 뉴스가 흐른다.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번지고 있습니다. 물을 함부로 먹지 마시고..."
몇 가지 주의사항이 흐르지만, 그녀(양귀매)에겐 바이러스가 출현했다는 사실보다 더 무서운 현실이 버티고 있다. 끊이지 않는 기침과 위층에서 새어나오는 물줄기. 마침 장마가 시작된 탓에 물줄기는 하루가 다르게 더욱 거세어진다. 아래층 여자가 낸 민원 탓에 위층 남자(이강생)에게도 근심이 생긴다. 남자의 집 마루엔 '구멍'이 생겼다.
흔히 '구멍'은 관음증적 쾌락을 만족시켜줄 소재로 차용되기 일쑤지만, 차이밍량 감독은 구멍을 애꿎은 에로티즘의 도구로 전락시키지 않았다. 이 영화의 '구멍'은 바이러스가 퍼져 접촉이 차단된 사람들에게 외로움을 덜어줄 해열제다. 접촉이 차단됐지만 접촉에 목마른 사람들은 구멍을 통해서나마 타인과 소통하길 꿈꾼다.
남자는 구멍을 통해 여자의 집을 훔쳐보고, 그 집에 온기가 없다는 것, 그 집의 주인이 감기에 걸려 콜록거린다는 걸 알게 된다.
영화는 이 지루한 훔쳐보기의 와중에 현란한 뮤지컬 화면을 집어넣는다. 감기에 외로움까지 겹친 아랫집 여자는 뮤지컬 화면 속에서 50년대 대만의 톱 가수였던 그레이스 창의 노래를 부른다. 판타지 화면 속의 그녀는 현실 속 그녀와 많이 다르다. 화려한 옷을 걸치고 현란한 칼립소 춤을 춘다. 그녀 주위엔 남자가 많다. 그녀는 최소한 판타지 안에선 스타다.
그러나 영화는 모든 걸 잊게 해줄 이 중독성 판타지 안에도 암울한 현실을 상기시켜 줄 하나의 코드를 끼워 넣는다. 그건 바로 아랫집 여자가 앓고 있는 지독한 감기다. 몽상 속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아프다. 콜록, 콜록. 그녀는 기침을 한 뒤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콜록, 콜록, 여러분도 감기조심!"
죽을 병은 아니지만 불치병일지도 모를 여자의 외로움은 몽상으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녀는 결국 판타지 속의 자신과 달리 악성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그때 영화는 이 암울한 현실 속에서 구원의 이미지를 들이민다. 쓰러져 가는 그녀 앞에 '손'이 내려오고, 그녀는 남자가 내민 손을 받아 쥔 채 윗층으로 올라간다.
비가 내리고 연신 물이 새는 이 잔혹한 현실 속에서도 차이밍량 감독은 결국 희망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이밍량 감독은 말한다.
"구멍은 상대방을 발견하게 하는 도구이자 통로다. 영화 속 인물의 가장 큰바람은 누군가에게 손을 뻗어주거나 마실 물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차이밍량 감독은 희망을 결코 미래에서 찾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는 '세기말 이후'는 여전히 어둡다. 그는 미래에 대한 비관적 회의를 과거에 대한 향수로 해결하려는 듯하다. 영화의 마지막 멘트는 이를 반증한다.
"사는 것 자체가 끔찍했던 시절 우리의 삶을 위로해준 그레이스 창에게 감사한다. 2000년에도 그레이스 창의 노래로 위안을 얻을 수 있기를."
범죄와 폭력, 정치적 혼란, 환경 오염, 커뮤니케이션의 단절 등 여전히 산적해 있는 세기말적 징후들을 뒤로한 채 그레이스 창의 뮤지컬이 유행했던 50년대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감독의 시선은 슬프다.
그래서 <구멍>은 희망에 관한 엽서이자 희망의 단초까지 말려버리는 슬픈 레퀴엠이기도 하다.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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