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인터뷰]<순애보>의 이재용 감독 "슬픈 이야길 웃기게 하고 싶다"

  • 입력 2000년 12월 8일 11시 40분


인간의 기억력은 불완전하다. 못난 기억력에 의존해 보건대, <정사>를 막 끝내고 만난 이재용 감독은 유독 한 가지 질문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일본 영화적인 느낌이 많이 들어요." "저, 일본영화 거의 본 적 없는데…왜 자꾸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이번에도 예외 없이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저, 일본 신세대 소설 거의 본 적 없어요"라고 변명하듯 말했다. 그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조차 읽지 않았다고. "장편소설은 호흡이 가빠 잘 읽히지 않는다"고 했다. <순애보>에 일본 신세대 소설다운 감성이 많이 스며든 이유는, 그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창작자들의 감수성이 비슷하기 때문"이란다.

죽음을 꿈꾸는 일본 소녀 아야(다치바나 미사토)와 동사무소 말단 직원인 우인(이정재)의 만날 듯 말 듯한 사랑을 담은 <순애보>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코드가 많이 숨겨진 영화다. 등장 인물의 이름조차도 함부로 지어진 것이 아니고, 자신의 전작인 <정사> <호모 비디오쿠스> <한 도시 이야기> 등을 '자기 복제'한 흔적도 농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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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쿠엔 필름과 일본의 쇼치쿠 영화사가 합작한 영화 <순애보>는 일본과 한국 젊은이들의 동시대 정서를 차용하고, 또 그것을 통해 우연처럼 다가오는 필연의 사랑을 말한다. 한국과 일본, 동시대의 호흡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부쳐지는 긴 연애 편지 같은 영화.

<순애보>를 연출한 이재용 감독은 현재 조바심 내며 영화의 개봉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를 만나 영화에 대한, 영화에 숨겨진 재미있는 코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이재용 감독이 풀어놓은 <순애보> 이야기.

우연과 인연의 모티프에 집착하는 이유는?

-집착하는 건 아닌데…이상하게 이런 영화를 두 편이나 만들게됐다. 그 상황 자체가 우연이자 인연이 아닐까. <순애보>의 기획 아이템, 이를테면 두 도시에서 살아가는 서로 다른 남녀, 인터넷을 통한 만남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재밌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는데, 이건 실제로 내가 우연과 인연에 관한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작년 6월경인가, 동경 지하철에서 10년만에 우연히 아는 후배를 만났다. 우린 하필이면 그 지하철 같은 칸에 타고 있었고, 함께 탔더라도 못 볼 수 있었는데 서로를 보게 됐다. 난 이런 경험을 정말 많이 했다. 거짓말 같은 우연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살면서 이런 경험을 많이 해봤을 것이다. 그 사건이 모티프가 된 건 아니지만, 일종의 '확인'이거나 무의식적인 자극 정도는 됐던 것 같다.

<정사>의 '이우인'은 <순애보>에서도 여전히 '이우인'이다. 같은 배우가 같은 이름의 배역으로 출연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정재가 이 영화에 출연하겠다고 했을 때 갑자기 '이우인'이란 이름을 그대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우인, 어감이 좋다.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우연'과 '인연'의 앞 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라는, 일종의 말장난도 섞여 있고. 난 <정사>의 이우인이 어릴 적 이민을 가지 않고 한국에 살았더라면 <순애보>의 이우인처럼 되지 않았을까, 란 생각을 해봤다.

두 사람은 성격이 많이 다른 인물인데…. <정사>의 이우인은 <순애보>의 이우인보다 훨씬 세련된 남자가 아니었나?

-기본 성격은 같다. 혼자 있는 거 좋아하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남자. 사람들은 <순애보>의 이우인이 좀 망가진 캐릭터고 <정사>의 이우인은 세련됐다고 하는데, 사실은 <정사>의 이우인도 절대 세련된 인물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축구하는 거 좋아하고 지저분한 오락실에서 오락이나 했던 인물이 아닌가. 난 한국이란 나라가 <정사>의 이우인을 <순애보>의 이우인처럼 만들어놓았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에 대한 적대감의 표명인가?

-한국사회는 각박하다. 멋있게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만드는 사회다. 버스 타고 있는데 그냥 출발해버려 넘어지게 만들고, 한마디로 우아할 틈을 안 준다.

그렇다면 <정사>의 우인과 <순애보>의 우인의 다른 점은?

-아버지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포기했다는 점에선 같다. 거세된 남성의 표본이랄까. 하지만 <순애보>의 우인에겐 '호모 포비아(동성애 혐오증)'적인 성향이 짙게 배어있다. 매형이 "속옷 빨아 줄게", "등 좀 밀어줄래?"라고 말할 때 우인이 보이는 뜨악한 표정이 이를 반영한다.

한국의 20대 청년인 우인의 일상은 취재 없이도 잘 그려낼 수 있었겠지만, 일본 18세 소녀의 삶을 포착하는 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취재를 많이 했나?

-솔직히 취재 같은 건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게을러서…. <정사> 때 30대 아주머니들에게 "이럴 땐 가정을 버리시겠어요?" 같은 조사를 했었는데, 이번엔 그냥 느낌으로 그려냈다. 영화 촬영 전 일본에서 잠깐 생활했을 때도 내 일과는 그냥 서점에 가고, 길거리에 앉아 사람 구경하는 일밖엔 없었다. 심지어는 일본 영화 한 편 보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 봐서 뭐하나. 그냥 '느낌'으로 그려나간 캐릭터다.

이 영화엔 <정사> 뿐 아니라 당신의 성공적인 단편 <호모 비디오쿠스>와 미완성 다큐멘터리인 <한 도시 이야기>의 색깔이 많이 배어 나온다.

-어떤 사람은 이 영화가 <정사>와 비슷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많이 다르다고 한다. 난 이 영화가 <정사>와 많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걸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원래 이 영화의 매형 역으로 송영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에 캐스팅할 수 없게 됐지만. 난 우인의 매형이 <정사>에서 집나간 아내를 두었던 송영창의 분신쯤으로 봐주길 바랬다. <호모 비디오쿠스>에서 TV 모니터에 앵글을 많이 맞췄던 것처럼 이 영화에서도 인터넷 모니터에 앵글을 많이 맞췄다. <한 도시 이야기>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두 도시 이야기'라는 포맷으로 이 영화에 스며든 셈이고. <순애보>는 가장 '나다운' 영화다. 하고 싶은 걸 다 해봤다.

전작들의 분위기에 코미디 코드들 덧붙인 점도 재미있다.

-<순애보>의 주인공들은 모두 비극적이다. 미혼모의 몸에서 태어나 다시 미혼모가 된 리에, 명문대 출신인 줄 알았지만 실제론 포르노 관련 일을 하며 살아가는 다카시, 레즈비언인 미아, 외국인 노동자 네마자데 등. 주인공은 물론이고 조연 캐릭터들도 모두 불운하다. 하지만 난 슬픈 이야기를 그냥 슬프게 그리고 싶지 않았다. 슬픈 이야기를 항상 웃으면서 하고 싶은 게 내 욕심이다.

<정사>에서보다 삶의 자질구레한 일상이 많이 노출되어 있는 편이다.

-키치적인 코드를 좋아한다. 먹고, 싸고, 배설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잘 살렸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만족스럽다.

'키치적 코드'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이정재가 토악질하는 장면은 어떻게 찍은 건지 보는 내내 궁금했다.

-물을 3리터쯤 먹이고 실제로 토하게 했다. 고생 많이 해서 찍은 장면이다.

<정사>는 리우데자네이루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영화를 끝냈고, 이 영화는 꿈꾸는 장소에 도착하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은 뭐라고 생각하나?

-알래스카 신을 꼭 넣을 필요는 없었다. 하고 싶은 이야긴 그 전에 다 한 셈이다. 그건 일종이 '당의정' 같은 거다. 차이밍량 스타일로 영화를 만들면 관객이 많이 들겠는가. 난 관객과 함께 호흡하고 싶다. 누가 채근해서 타협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두 사람이 만나게 함으로써 멜로적인 코드를 넣고 싶었다. 고상한 척하고 싶었으면 알래스카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영화를 끝냈을 것이다. 내 생각엔 그게 오히려 타협이다.

두 사람이 꿈 꿨던 알래스카는 '겨울'이었는데, 실제로 두 사람이 찾아간 알래스카는 가을 풍경이다. 이건 꿈과 현실의 괴리감을 표현하는 것인가?

-그렇다. 꿈과 현실은 항상 같지 않으니까.

아야의 '구두'가 담고 있는 의미는?

-구두는 떠남의 이미지이기도 하고, 프로이드의 분석에 의하면 '성적인 욕망'이기도 하다. 아야가 구두 상자를 여는 장면은 성적 욕망의 발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식으로 한 번 표현해보면 어떨까? 우인을 한 마리의 정자로, 아야를 한 마리의 난자로 설정했을 때, 두 개가 만날 수 있는 확률은 몇 억 분의 1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비행기로 은유된 '질'을 통과해 '자궁' 같은 이미지의 알래스카에 도착한다. 알래스카는 신성한 공간이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론 섹스가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 영화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코드가 많이 삽입되어 있다. 이름으로 장난친 대목도 많고.

-우인은 아까 말했듯이 우연과 인연의 합성어. 아야의 인터넷 예명인 '아사코'는 피천득의 <수필>에서 따온,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일본 이름이다. 아사코란 이름은 일본어로 조자(朝子, 아침에 태어난 사람)란 뜻인데, 영화 속에서 그녀가 "아침에 올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아사코란 예명을 갖게 됐다. 이건 루이 브뉘엘의 <세브린느>를 염두에 둔 설정이다. <세브린느>의 여주인공은 "낮에 오는 여자"라는 예명을 갖고 있다. '낮에 오는 여자'와 '아침에 오는 여자'…재미있는 대구(對句) 아닌가. 또 일본에 사는 외국인 불법 노동자를 이란 인으로 설정했을 때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만든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떠올랐다. <내 친구의 집-> 주인공 이름이 네마자데였고, 이건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이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재미있는 코드를 많이 삽입한 까닭은?

내가 4.19 세대였거나 그보다 더 오래 전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윤동주의 시구를 인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토양은 어쩔 수 없이 TV나 영화 같은 대중문화다. 그건 일부러 이런 코드를 담아야지 고민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내 토양에서 우러나와 영화로 스며든 것이다.

<정사>와 <순애보>가 비슷한 스타일이어서 인지, 다음엔 어떤 영화를 만들 지 더 궁금하다. 스타일리스트적인 측면을 계속 살려나갈 것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지금 준비중인 작품은 사극이다. 우리 나라에도 새로운 형식의 사극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주 멋진, 폼 나는 사극을 만들 거다. 난 장르 영화의 틀 안에서 그걸 조금씩 깨버리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언젠가는 다큐멘터리를 한 편 만들어 보고 싶은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칙칙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아주 재미있는 그런 다큐멘터리를 만들 것이다.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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