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모두를 위한 판타지 동화<그린치>

  • 입력 2000년 12월 12일 13시 16분


<그린치>의 배경은 후빌(Whoville) 마을. 이곳에 살고 있는 종족의 이름은 후(Who)다. 마을과 종족의 이름이 '누구(Who)'를 지목하고 있는지 불분명하듯, <그린치> 역시 '누구를 위한 영화'인지 모호하다. <그린치>는 말하자면 불특정 다수를 타깃으로 한 영화다. '크리스마스용 어린이 가족 영화'라는 긴 타이틀을 붙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아마도 론 하워드 감독은 팀 버튼이 오래 전 '소수의 팬만을 위해' 만들어낸 크리스마스 악몽의 전설(크리스마스의 악몽)을 어른과 아이 모두를 위한 동화로 바꾸고 싶었던 듯하다. <아폴로 13> <랜섬> 등 별로 새로울 것 없는 블록버스터 영화로 흥행 감독이 된 론 하워드 감독은 팀 버튼의 상상력 공장에서 튀어나온 독창적인 <크리스마스의 악몽> 이미지를 빌려와 '모두'를 위한 판타지 가족 영화로 둔갑시켰다.

'이야기 할아버지'처럼 과장된 앤소니 홉킨스의 내레이션이 흐르면 관객은 자연스럽게 후빌 마을의 염탐꾼이 된다. 크리스마스 이브, 마약에 취한 듯 온 마을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축제 준비에 여념이 없다. 선물을 포장하고 집안을 단장하고. 크리스마스 트리와 전등으로 장식된 집들은 마을을 온통 축제 분위기로 바꾸어 놓는다.

후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입이 튀어나왔고 코는 빨갛다. 이렇게 생겨야 '후빌 족'이라는 듯 생김새가 모두 비슷하다. 하지만 그린치(짐 캐리)는 색깔부터 생김새까지 후빌 족과 완전히 다르다. 입은 튀어나오지 않았고 코도 빨갛지 않다. 대신 그는 녹색몸과 온몸을 뒤덮는 무성한 초록 털을 지녔다. 어린 시절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은 뒤 후빌 마을에서 자진 퇴청한 그린치는 크리스마스를 사랑하는 '후족'을 증오한 나머지 크리스마스까지 증오하게 된다.

영화는 앤소니 홉킨스의 목소리를 빌어 "왜 그린치는 크리스마스를 싫어할까요? 그린치는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훔칠까요?"라는 질문을 던지는데 해답은 의외로 명확하다. '누가, 왜, 어떻게' 등의 의문형만 남발하고 있을 뿐 이 영화는 관객들의 머리를 굴리게 할만큼 고난도의 추리극을 만들어내진 못했다.

대신 <그린치>는 이솝우화처럼 친절한 방식으로 몇 가지 교훈을 전해준다. 겉모습만 보고 쉽게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구별하지 말 것. 화려한 축제의 뒷면에 숨어있는 불행한 사람들을 돌아볼 것. 축제의 진정한 의미는 선물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일이라는 것.

영화 속에서 그린치의 내면을 새롭게 들여다 본 인물은 꼬마 소녀 신디(테일러 멈센)다. 그녀는 그린치와의 짧은 만남 이후 "어쩌면 그린치는 나쁜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실제로 그린치는 후빌 마을의 크리스마스를 엉망으로 만들었지만 결코 나쁜 인물은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모든 오해는 풀리고 크리스마스의 환상적인 분위기가 절정에 달한 가운데 엔드 크레딧이 올라간다. 이런 이야길 보며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린치>엔 뭔가 부족한 게 있다. 분장이나 세트 제작에 들인 수고를 감안하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첫 장면부터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뻔히 노출한 이 영화는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의 악몽>에 비해 신선함이 떨어진다. 후빌 마을은 인형 공장처럼 생기가 없고 후빌 족들이 전해주는 교훈엔 애교가 있는 대신 재치가 없다.

그러나 흥행에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곧바로 컬트목록에 입적된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의 악몽>에 비해 이 영화는 훨씬 높은 흥행 성과를 거뒀다. 개봉 첫 주 이 영화가 거둬들인 흥행수익은 총 5,508만 달러. 이는 첫 주 5,785만 달러의 수익을 올린 <미션 임파서블 2>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높은 흥행 수치다.

57년 수스 박사에 의해 처음 소개된 후 오랫동안 미국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동화 <그린치>의 '생기 없는' 스크린 버전. 이 영화엔 오랜 분장으로도 숨길 수 없는 짐 캐리 특유의 멋진 표정 연기가 있다. 그것만이 이 영화의 유일한 희망이다.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 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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