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마술적 신비주의로 채워진 맑은 동화<루나 파파>

  • 입력 2000년 12월 14일 15시 51분


중앙아시아에서 날아온 색다른 신비주의 영화 <루나 파파>의 리뷰 2편을 함께 싣는다(편집자 주).

<루나 파파> 리뷰 1. 마술적 신비주의로 채워진 맑은 동화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소설은 독자를 가끔 지치게 한다. 마술적 신비주의에 흠칫 놀라면서도 언제 어디서 숨을 쉬어야 할 지 갈피를 잡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건 일종의 '숨막히는 완벽함'이다.

마르케스의 소설을 생각나게 하는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는 그보다 훨씬 편안하다. 그 안엔 마술적 신비주의와 함께 밝은 유머가 있다.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를 생각나게 하는 영화 <루나 파파>는 이보다 더 가뿐한 호흡으로 마술적 신비주의를 담아낸다.

타지키스탄 출신 바크티아르 쿠도이나자로프 감독의 99년작 <루나 파파>는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영화에서 '이데올로기'를 말끔히 지워낸 듯한 영화다.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영화가 삶에 관한 유쾌한 농담이었다면, <루나 파파>는 삶에 관한 순진한 동화에 가깝다. 동화를 읽어주는 이는 엄마도 할머니도 아닌 어린 꼬마다.

"이건 우리 엄마가 날 낳기 전에 있었던 이야기예요." 꼬마 아이 루나의 귀여운 내레이션이 흐르면 무대는 카스피해 연안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 파코로 옮겨진다. 셰익스피어 극의 배우가 되고 싶어하는 소녀 말라카(슐판 카마토바)는 다혈질이지만 심성만은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아빠 자파르(아토 무카메자노프), 전쟁중 사고를 당해 정신연령이 3세로 낮아진 오빠 나자르딘(모리츠 블라입트르)과 함께 살고 있다. 엄마는 말라카를 낳다 일찍 숨을 거뒀다.

어찌 보면 '콩가루 집안'의 막내 딸인데도, 말라카는 절대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녀는 말똥 굴러가는 소리에도 웃음을 터뜨리는 17세 소녀일 뿐이다. 그런 그녀가 어린 나이에 불쑥 임신을 한다. 톰 크루즈를 만나는 게 소원이었던 그녀는 초여름 스산한 달빛 속에서 한 남자의 구애를 받는다. 그는 자신이 톰 크루즈의 오랜 친구라고 말한 뒤 그녀의 몸을 탐한다. 그녀가 낳은 아이의 이름은 '루나'. 말라카의 가족들은 루나의 아버지 찾기에 혈안이 되고 그때부터 영화는 유쾌한 로드무비로 뒤바뀐다.

'루나 파파'를 찾아가는 과정은 험난하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남자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낼 수 있겠는가. 루나 파파 찾기를 포기한 가족은 여행중 '루나의 아빠'가 되어주겠다는, 말라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만난다. 그는 완벽하다. 하지만 '억세게 재수 없는 소녀' 말라카는 결혼식 날 신랑과 아빠를 동시에 잃는다. 하늘에서 난데없이 황소가 떨어져 두 사람을 하늘나라로 데려가버린 것이다.

심란할 정도로 억센 운명을 타고 난 말라카의 삶을 감독은 절대 심각하게 그려내지 않는다. 마술적 신비주의로 그려낸 아름다운 정사신, 처연하기보단 산뜻하고 귀엽게 그려지는 죽음의 향연. 파코 마을은 악한 사람도 없고 아무 고민도 없는 무릉도원을 연상시킨다. 가족간의 사랑이 듬뿍 담긴 이 영화에 대해 감독은 '전세계 여성들에 관한 영화'라는 색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말라카에게 벌어진 사건은 전 세계 어느 나라 어떤 여성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반적인 이야기다. 말라카는 수백만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자식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싸운다. 고대 그리스 어머니들이 그랬고, 오늘날 인디언 어머니들 또한 그렇게 살아간다. 남자들이 화성과 목성에 로켓을 쏘아 올리는 동안 말이다."

'모성애의 위대함'을 말하는 이 영화는 올해 부산영화제에 소개되어 호평을 받았으며, 동경영화제 최우수 예술공헌성, 낭트영화제 그랑프리, 브뤼셀영화제 영 유로피언 심사위원상 등을 수상했다.

황희연 기자<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루나 파파> 리뷰 2. 익살 가득한 달빛 환상극

달빛이 어슴푸레하던 사막의 밤. 어둠속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셰익스피어 연극관람을 놓치고 울먹이는 소녀를 유혹한다. 그녀가 열망하던 톰 크루즈의 친구라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경사진 모래언덕에서 미끄러져내리는 그녀의 몸에 달빛처럼 어리고 그녀는 ‘원자폭탄’처럼 터져버린다.

그날밤 그일로 소녀는 아기를 잉태하고 소녀의 아버지와 오빠는 아기 아빠를 찾아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셰익스피어 연극무대란 무대는 다 급습하며 배우들을 납치한다.

우리말로 옮기면 ‘달빛 아빠’쯤 될 ‘루나 파파’(Luna Papa)는 내전의 악몽에 시달리는 중앙아시아 타지크스탄의 영화라고 믿기지 않을만큼 사랑스럽고 환상적이다.

마을 지붕 위를 저공비행하는 구식 복엽기와 사막을 달리며 약탈을 일삼는 탱크, 거리 한복판에서의 총격전, 호텔에서의 테러는 분명 중앙아시아의 현실이 담겨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비극적 현실조차 초월하도록 만드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가득 차있다.

영화의 나래이션을 진행하는 주인공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뱃속의 아기인가하면 여주인공의 건장한 오빠는 전쟁터에서 부상으로 세 살정도의 지능을 지녔다. 하늘에서 떨어져내린 황소로 결혼식이 순식간에 장례식으로 뒤바뀌는가 하면 뒤늦게 나타난 아기아빠는 극도의 공포감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이 영화는 고통스럽고 누추한 현실을 낙천적인 집시적 세계관의 렌즈를 통해 한판의 익살극으로 승화시켜버리는 에밀 쿠스트리챠의 영화를 닮았다. 특히 인물묘사나 분위기는 여성판 ‘집시의 시간’이라 할만하다. 한편으론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 때문에 환상적 세계로 비약했다는 점에서 가브리엘라 마르케스의 소설을 떠올리게한다. 또 한편으론 창공을 가르는 비행에 대한 영상표현은 샤갈의 그림이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세계와도 닿아있다.

놀라운 점은 감독 바크티아르 쿠도이나자로프가 겨우 35세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구소련에서 영화를 배운 그는 93년 두 번째 영화 ‘코시 바 코시’로 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할만큼 독창적 영상세계를 구축해오고 있다.

순수하면서도 용감한 여주인공 말라카역을 연기한 슐판 카마토바의 천진한 표정연기는 매력적이다. 특히 그녀가 낙태수술을 받기위해 산부인과를 찾아가는 장면은 압권. 무지막지하지만 속정 깊은 아버지 자파르역의 아토 무카메자노프는 타지크스탄의 국민배우이고 바보연기를 펼친 오빠 나세르딘(모리츠 블라입트르)은 ‘노킹 온 헤븐스 도어’와 ‘롤라 런’에서 낯익은 독일배우다. 결코 기사로 밝힐 수 없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팬들에겐 올 크리스마스 최고의 선물이다. 23일 개봉. 15세관람가.

<권재현기자>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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