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루나 파파>,익살 가득한 달빛 환상극

  • 입력 2000년 12월 14일 19시 02분


달빛이 어슴푸레하던 사막의 밤. 어둠속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셰익스피어 연극관람을 놓치고 울먹이는 소녀를 유혹한다. 그녀가 열망하던 톰 크루즈의 친구라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경사진 모래언덕에서 미끄러져내리는 그녀의 몸에 달빛처럼 어리고 그녀는 ‘원자폭탄’처럼 터져버린다.

그날밤 그일로 소녀는 아기를 잉태하고 소녀의 아버지와 오빠는 아기 아빠를 찾아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셰익스피어 연극무대란 무대는 다 급습하며 배우들을 납치한다.

우리말로 옮기면 ‘달빛 아빠’쯤 될 ‘루나 파파’(Luna Papa)는 내전의 악몽에 시달리는 중앙아시아 타지크스탄의 영화라고 믿기지 않을만큼 사랑스럽고 환상적이다.

마을 지붕 위를 저공비행하는 구식 복엽기와 사막을 달리며 약탈을 일삼는 탱크, 거리 한복판에서의 총격전, 호텔에서의 테러는 분명 중앙아시아의 현실이 담겨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비극적 현실조차 초월하도록 만드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가득 차있다.

영화의 나래이션을 진행하는 주인공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뱃속의 아기인가하면 여주인공의 건장한 오빠는 전쟁터에서 부상으로 세 살정도의 지능을 지녔다. 하늘에서 떨어져내린 황소로 결혼식이 순식간에 장례식으로 뒤바뀌는가 하면 뒤늦게 나타난 아기아빠는 극도의 공포감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이 영화는 고통스럽고 누추한 현실을 낙천적인 집시적 세계관의 렌즈를 통해 한판의 익살극으로 승화시켜버리는 에밀 쿠스트리챠의 영화를 닮았다. 특히 인물묘사나 분위기는 여성판 ‘집시의 시간’이라 할만하다. 한편으론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 때문에 환상적 세계로 비약했다는 점에서 가브리엘라 마르케스의 소설을 떠올리게한다. 또 한편으론 창공을 가르는 비행에 대한 영상표현은 샤갈의 그림이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세계와도 닿아있다.

놀라운 점은 감독 바크티아르 쿠도이나자로프가 겨우 35세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구소련에서 영화를 배운 그는 93년 두 번째 영화 ‘코시 바 코시’로 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할만큼 독창적 영상세계를 구축해오고 있다.

순수하면서도 용감한 여주인공 말라카역을 연기한 슐판 카마토바의 천진한 표정연기는 매력적이다. 특히 그녀가 낙태수술을 받기위해 산부인과를 찾아가는 장면은 압권. 무지막지하지만 속정 깊은 아버지 자파르역의 아토 무카메자노프는 타지크스탄의 국민배우이고 바보연기를 펼친 오빠 나세르딘(모리츠 블라입트르)은 ‘노킹 온 헤븐스 도어’와 ‘롤라 런’에서 낯익은 독일배우다. 결코 기사로 밝힐 수 없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팬들에겐 올 크리스마스 최고의 선물이다. 23일 개봉. 15세관람가.

<권재현기자>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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