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의 조감독으로 오랫동안 내공을 쌓아온 김대승 감독은 데뷔작을 선보이기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그가 어렵게 준비한 이 멘트는 <번지점프를 하다>에 관한 가장 친절한 설명이자 진심이 담긴 '최후 통첩'이다. 정형화된 틀에 끼워 맞춰 이 영화를 보지 말아달라는.
동성애 영화라느니 미스터리 영화라느니, 들풀처럼 무성한 소문을 남긴 <번지점프를 하다>는 뚜껑을 열자 이 모든 것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몇 겁의 윤회를 거쳐도 변심할 수 없는 사랑. <번지점프를 하다>는 남다를 것 없는 이 평범한 사랑을 담고 있으면서도 기존 멜로 영화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계보가 잡히지 않는 '박쥐'과다. 시간을 초월한 사랑을 다뤘다는 점에선 <동감>이나 <시월애>와 비슷하고, 그 무대가 학교라는 점에선 <여고괴담> 시리즈와 비슷하며, 선생과 제자 사이의 사랑을 담았다는 점에선 <내 마음의 풍금>과, 전생과 윤회의 사랑을 담았다는 점에선 <은행나무 침대>와 닮아 있다.
이 체할 듯한 융합은 그러나 이 영화에선 묘한 화합을 이뤘다. 데뷔 감독답지 않게 안정된 연출력을 선보인 김대승 감독은 이 엄청난 짜깁기를 오히려 퀼트조각 같은 하나의 예술품으로 승화시켰다. 1000명이 보면 1000개의 메시지가 생길 수 있는 이유는 "전체를 보느냐 부분을 보느냐"의 차이다.
80년대 복고주의로 무장한 이 영화는 첫 눈에 반한 두 남녀의 사랑을 '그 시대의 그 정서'로 풀어낸다. 한수산이나 최인호 소설에서 숱하게 봐왔던 정형화된 사랑. 국문과 남학생 인우(이병헌)와 미대 여학생 태희(이은주)가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시작하지만 남자의 군 입대로 안타까운 이별을 겪게 된다는 진부한 이야기가 이 영화의 초반을 장식한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17년 후의 이야기는 이보다 훨씬 새롭고 '판타스틱'하다.
첫 사랑을 짐짓 잊은 척 하는 국어교사 인우는 아끼는 제자 현빈(여현수)에게서 지금은 저 세상으로 간 첫사랑 연인 태희의 모습을 본다. 오래 전 태희가 인우에게 했던 "젓가락은 시옷 받침인데 숟가락은 왜 디귿 받침을 써요?"라는 질문을 현빈도 하고, 태희가 물건을 가리킬 때 새끼손가락을 폈던 것처럼 현빈도 그렇게 한다. 인우는 현빈을 태희로 착각한 나머지 현빈이 좋아하는 여학생(홍수현)에게 질투를 느끼고 현빈을 만지고 싶다는 열망에 빠진다. 현빈은 철부지 17세 남학생이자 자신의 제자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미 한 아이의 아빠이자 한 여자의 남편인 인우는 헷갈릴 수밖에 없다. "내게 성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나?" 정신과 진단을 받아도 풀리지 않는 숙제들. <번지점프를 하다>는 결국 이 모든 궁금증의 열쇠를 전생과 윤회의 문제로 넘겨버린다. 그래서 비로소 판타지의 옷을 입게 된 이 영화는 '번지점프를 할 때'의 스릴과 긴장감, 알싸함으로 관객의 마음을 다스린다.
생각해보면 영화 초반의 '오래된 사랑 이야기'도 군내날 만큼 진부하진 않았다. 애써 "너랑 자고 싶어"란 이야기를 해놓고 정작 여관에 가선 딸꾹질이나 해대는 남자, 그 사랑을 눈치 챘으면서도 짐짓 시치미 떼는 여자의 서툰 사랑 이야기는 곱게 빚어진 영상과 실루엣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촬영 덕분에 순백의 사랑 이야기로 승화되었다. 두 시대의 '사건'을 단절시키지 않고 교차편집한 것도 자연스럽게 다가오고 배우들의 연기도 흠잡을 데 없다. 다만 80년대에 대한 고증이 충실치 못하다는 건 아쉬운 점 중 하나(특히 태희의 옷이나 의상은 절대 80년대 스타일이 아니다).
<번지점프를 하다>는 한국 멜로영화의 수준을 한 차원 업그레이드시킨, 번지점프처럼 스릴있고 감독의 변처럼 메시지도 많은 예쁜 사랑의 퀼트 조각이다. 2월3일 개봉.
홈페이지 주소 http://www.gobungee.co.kr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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