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수의 러프컷]엿장수 감독, 카멜레온 배우

  • 입력 2001년 2월 1일 18시 41분


누구든지 자신이 보이고 싶은 대로 자기를 꾸며서 보일 권리가 있다. 하지만 당신이 배우라면 미안하게도 일단 감독이 생각하는 이미지와 맞춰야 한다. 그게 일치하지 않으면 타협하거나 혹은 싸워야 한다.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찍으면서 주연배우 진희경과 대판 싸운 적이 있다. 그녀는 그 역할을 예쁘고 발랄하게 하고 싶었던 것 같고, 난 반대로 그 여자가 무뚝뚝하면서 싸늘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싸운 다음 날부터 진희경은 나를 쌀쌀맞기 그지없이 대했지만, 난 오히려 그녀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고 그런 모습을 화면에 담으면서 다행스러워 했다.

그렇지만 그런 싸늘한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진희경과 함께 출연했던 강수연이 강력히 항의했기 때문이다.

뭣도 모르는 초짜 감독이 주연배우랑 싸우고 말도 안하고 지내면서 작품을 망치려든다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었고, 그때 우리 셋은 새벽까지 가는 거나한 술자리로 화해를 대신했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난 진희경 특유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와 고고한 태도를 어떻게 하면 잘 끌어낼까 고심했다.

‘눈물’의 신인배우 박근영은 원래 아주 여성스럽고 얌전을 떠는 스타일이었지만, 난 그녀를 터프하고 중성적 이미지의 소녀로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나한테 촬영 도중 “예쁜 척하지 말고 연기하라”는 구박을 밥먹듯이 받아야 했다.

나중에 거의 주눅이 들 정도가 된 그녀는 내가 또 뭐라고 연기 타박을 하면 “당신이 하도 예쁜 척하지 말라고 해서 그런 거다”고 가시 돋힌 발뺌을 하곤 했다.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블루’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인생의 절정기에서 사랑하는 남편과 딸을 교통사고로 잃은 여인이 있다. 지성적인 그녀는 늘 말이 없고 고고하다. 새로 이사 간 아파트에 이웃 여자가 인사차 찾아온다.

이웃집 여자는 하루도 남자가 없이는 잠들지 못한다고 말하는 헤픈 여자다. 잠시후 관찰을 끝낸 헤픈 여자가 고고한 여자에게 말한다.

“당신은 남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스타일의 여자군요!”

유치원생 같은 몸짓과 함께 앵앵대는 목소리를 내는 리포터, 또는 그와 유사한 직종의 여자들을 TV에서 왕왕 본다. 언제까지나 깜찍한 소녀이지 진지한 여인이기를 거부하는 대표적인 이미지이다. 항상 예쁘고 발랄하고, 일할 때는 군소리 없이 말 잘 들을 것만 같고, 일 끝난 뒷풀이에선 끝까지 남아 즐겁게 놀아 줄 것만 같은 여자들.

하지만 그건 남자들이 바라는 이미지일 따름이지 실제로 그런 여자란 별로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미지를 광범위하고 계속적으로 뿜어대는 건 재미없어 보이고 왠지 부당하게까지 느껴진다. 어떻습니까? 당신도 남자가 접근하기 쉬운 스타일이고 싶습니까?<영화감독>

namus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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