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고추말리기>돋보기로 본 여성 3대 이야기

  • 입력 2001년 2월 5일 19시 06분


10일 개봉할 장희선 감독의 독립영화 ‘고추만들기’는 영화찍기와 실제 삶을 하나로 겹쳐낸 영화다.

감독은 70대 친할머니와 50대의 어머니, 노처녀인 자신까지 여성 3대의 일상을 50여분의 다큐멘터리성 드라마에 담는다. 장사를 하는 어머니는 바깥일에 바쁘고 집안일을 도맡은 할머니는 노상 집만 지키느라 몸과 마음이 지쳤다. 또 딸은 뚱뚱한 몸매 때문에 어머니에게 늘 구박받으면서도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해 집구석에만 박혀산다.

어머니는 뚱뚱한 딸에게 “어휴, 저게 인간이야, 괴물이지”라고 면박을 주고 딸은 친구와 전화통화에서 “어떻게 저런 여자가 내 엄마일 수 있냐”고 씩씩거린다. 할머니는 손녀에게 “네 어머니가 데면데면하게 구는 것은 다 내 죄”라고 한탄하고 어머니는 “치매에 걸린 네 증조할머니 수발까지 다 들어준게 누군데”라며 코웃음친다.

이들은 한 집안에서 살아가지만 서로에 대한 불편한 심기 때문에 일상 곳곳에서 충돌하고 상처받는다. 여기까지는 ‘일상에 대한 돋보기같은 묘사’라는 점에서 홍상수 이후의 한국영화의 한 갈래일뿐이다.

이 영화가 다른 영화와 커다란 차이는 배우에서 찾을 수 있다. 장 감독은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직접 자신들의 일상을 재현시킨다. 이들의 연기지도에 바빠 감독 자신의 연기만, 같은 체형의 뮤지컬 배우 박준면에게 맡겼고 아버지와 남동생 등 다른 등장인물 역시 실제인물이다.

감독은 여기서 다시 각자의 연기 한꼭지가 끝나면 바로 해당인물이 연기 전후에 털어놓은 말을 인터뷰 형식으로 삽입한다. 자신의 일상을 똑같이 재현하는 배우들은 그때서야 깊숙이 숨겨둔 속내를 털어놓는다. 영화만들기가 자신은 물론 가족구성원에 대한 이해와 성찰의 도구가 되는 순간이다.

실제 할머니 최천수씨는 영화시사회장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보고 “내가 하고싶은 말을 다 해줘서 원이 없다”며 목이 메었다.

영화내내 딸에게 “영화감독 집어치우고 시집이나 가라”고 구박하던 어머니 설정원씨도 “이젠 시집 안가도 좋다”고 태도를 바꿨다. 단 건강을 위해서라도 딸의 몸무게를 20㎏는 빼야한다는 당부는 계속하고 있다.

설씨는 “처음 영화찍을 때는 장난하는 기분이었는데 극장 개봉까지 한다니까 우리 가족 모두가 벌거벗고 무대에 오른 기분”이라면서 “다음에는 진짜 연기에 도전해보겠다”고 웃음을 터뜨렸다.

장 감독에게 ‘혹시 이란의 마흐말바프가(家)가처럼 가족 모두가 감독과 배우로 나서는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다음부턴 가족들 데리고 영화 안 찍는다”고 정색을 한다.

“엄마와 할머니의 느낌이 그대로 우러나오는 배우를 찾을 수 없었기에 두 분을 배우로 기용했을 뿐이에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등 우수 독립영화를 개봉작으로 발굴해온 인츠닷컴의 세번째 작품으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단독 개봉한다. 1인당 4000원이지만 여성 2대가 올 경우 한명은 무료, 3대가 올 경우는 전원 무료다.

<권재현기자>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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