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환경이 5일 눈물없이 볼 수 없다는 ‘여로’의 공연장을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색시야∼.”
어느새 여기저기서 훌쩍 훌쩍 눈물닦는 소리가 들린다.
“결국 영구랑 분이가 만나네.”
관객들의 박수와 눈물을 뒤로 한 채 분장실로 간 이환경을 맞는 첫 손님은 극중 표독한 영구 계모역으로 욕을 ‘바가지로 먹던’ 박주아였다.
박주아가 먼저 말을 건넨다. “어, 웬일이야. ‘시집가는 날 등창난다’더니 요즘 내가 그 꼴이야. 목소리가 잠겼어.”
이에 이환경은 “궁예 장모님. 아니 누님, 좋았습니다. 역시 못된 시어머니는 박주아가 최곱니다”라고 답한다. 박주아는 장욱제의 분장실이 복잡하니 자기 방을 빌려준단다.
이환경〓70년대로 다시 돌아간 느낌입니다. 그 시절 TV와 30년이란 시대의 공백을 무대로 한꺼번에 채우는 느낌입니다.
장욱제〓관객이 어떻게 생각할까 항상 걱정인데. 옛날 ‘여로’의 90%만 나와도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는 영구가 고무신을 뒤로 확 벗으면서 방안으로 들어가는 게 화제였는데.
이〓‘여로’를 관람하면서 객석에 있는 어르신들 표정 꼼꼼하게 챙겨 봤어요. 웃다 울다 너무 행복해 하시더라구요.
장〓배우나 관객이나 이 작품은 언제나 추억 속에 있죠. 안 그러겠어요. KBS의 연말 특집 때면 영구와 분이가 만나는 ‘찾았다’ 장면을 20년간이나 방송했는데. 방송 테이프가 귀한 시절 한 테이프에 계속 촬영하는 바람에 그 마지막 회밖에 없답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에요.
이〓‘여로’의 극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으셨던 작가 이남섭 선생을 제가 30대 초반 ‘어릴 때’ 만났습니다.
장〓정말 대단한 분이었요. 68년부터 72년까지 그 분 드라마는 무조건 ‘대박’이었습니다. 저는 그 분하고만 작품을 하다시피했어요.
이〓지금 방송사에는 ‘여로’같은 시대극이 없습니다. 그걸 쓸 수 있는 작가도 드물어요. 젊은 작가는 옛날을 모르고, 옛날 작가는 요즘 감각을 모르고.
장〓그게 세월이죠.
이〓거의 30년만에 연극 ‘여로’를 하시는 데 느낌이 어떻습니까.
장〓가장 큰 고민은 20대의 젊은 분이(김혜영)와 연기하는 것이었습니다. 턱없이 늙어 보이면 주책이 되거든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면 그걸로 성공입니다.
이〓저도 ‘여로’의 팬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작은 TV 화면이 아니라 무대로 펼쳐진 공연으로 보는 것은 색다른 즐거움이었습니다.
장〓그런데 ‘용의 눈물’ ‘태조 왕건’, 정말 그 어려운 사극의 글은 어디서 나오나요.
이〓(웃음) 작가가 대 히트 치면 꼭 병이 생깁니다. 다음에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나 부담 때문이지요.
장〓거, 배우랑 똑같네.
이〓‘용의 눈물’ 다음 ‘태조 왕건’을 쓰려니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메어지더라구요. 허, 또 어떻게 쓰나. 그래서 ‘글반 술반’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 며칠 뒤 가슴에 풍선을 넣는 치료를 받으랍니다. 뭔지 잘 모르겠어요. 잘 아시겠지만 큰 성공 뒤에 걷잡을 수 없는 허탈감이 밀려오게 마련입니다. ‘여로’ 끝나면 계획은.
장〓다시 장사꾼(주류 유통업)으로 돌아가야죠. 혹 이선생이 나한테 맞는 드라마에 불러 준다면 몰라도(웃음). 배우는 자기를 아는 작가와 연출자를 만나야 합니다.
공연은 11일까지 오후 3시, 7시반. 2만∼5만원. 02―3675―0959
■뒤풀이 뒷얘기…"젊은 연기자에겐 박주아 호통이 藥"
세종문화회관 옆 설렁탕 집. 밤 공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장욱제 등 배우들은 빠지고 나머지 제작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작가 이환경과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린 극단 ‘세령’의 황지수 대표 등 일행 6명은 딱 한병만 하기로 했다.
“태현실씨의 젊은 시절을 연기하는 귀순 여배우 김혜영도 잘 하대요.”
누군가 이렇게 말하자 이환경은 “젊은 연기자에게는 박주아씨가 ‘약’”이라고 말했다. 대사 외우다 헤매고, 연기가 안되면 아무리 인기있어도 그 배우는 박주아에게 혼쭐이 난다는 것. ‘태조 왕건’은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단다.
다시 누군가의 말.
“궁예가 아쉽죠. 정치를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얘기가 무르익으면서 소주병 숫자가 늘어난다.
“딱 세 병만 하죠.”
그러나 결국 일행이 일어설 때 ‘참이슬’ 빈병은 7개나 서 있었다.
<김갑식기자>gs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