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부터 남자배우 나이 서른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인생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그게 연기에 배어나올 수 있는 서른 이전까지의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서른을 맞는 내 마음은, 뭐랄까, 이젠 정말 연기를 운명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해도 될지….”
자기 자신을 오랫동안 들여다본 사람 특유의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던 그는 씩 웃더니 “요즘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가 내 18번”이라고 알려준다. 9년전 MBC TV ‘우리들의 천국’에서 대리석 조각상 같은 외모로 어필했던 미소년이 이제 어른이 되었구나, 새삼 생각하게 한다.
최근 그는 부산을 배경으로 네 남자의 21년에 걸친 우정을 그린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3월말 개봉예정) 촬영을 끝내고 SF영화인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촬영을 시작했다. ‘친구’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이전 영화들에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야비한 깡패.
“부산 사투리가 내겐 거의 외국어같아서 리듬과 음을 하나씩 외웠다. 첫 촬영을 하던 날은, 끝이 갈라지는 거친 목소리를 만들려고 며칠간 물도 안마시고 촬영 두시간전부터 담배 세갑을 피 우기도 했다.”
인상깊었던 대사 한 마디를 부산 사투리로 해달라니까 “욕인데, 해도 되나요?”하면서 멋쩍게 웃는다. 그럴듯한 경상도 사투리로 장난삼아 욕설 몇마디를 내뱉는 동안에도 그의 눈에는 웃음기가 가득하다. 저렇게 선한 눈매로 깡패라니…. 불쑥 “혹시 외모에 불만을 느낀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의외로 “한동안 아주 심했다”고 대답한다.
“순정만화 주인공같다는 말이 듣기 싫었고, 여러 역할을 못하는 생김새를 가진 배우같아 괴로웠다. 한석규, 박신양처럼 생겼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도 했고…. 그런데 이젠 그냥 인정하는 마음이 생긴다.”
콤플렉스로 여겼던 외모를 장점으로 받아들이도록 북돋아준 사람은 영화배우 박중훈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함께 출연했던 박중훈은 외모로 고민하던 그에게 “알랭 들롱을 연구하라”고 충고했다고.
“중훈이 형 말을 듣고 알랭 들롱 영화를 전부 봤는데 ‘태양은 가득히’를 보며 느낀 게 있다. 알랭 들롱이 악행을 저지를 때도 그의 편을 들게 되던데, 만약 그가 아니었더라도 보는 이가 그런 느낌을 갖게 됐을까. 그렇다면 나도 그런 게 가능하지 않을까. 외형적 특성을 복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외모에 대한 자의식이 없어진 덕택일까. 배역에 몰입된 연기를 보여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후 ‘아나키스트’에서도 그의 배역은 일찍 죽어 사라지는 것이었지만, 냉소적 눈빛으로 영화 전체의 허무한 분위기를 살려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친구’는 그의 6번째 영화이지만 그는 “진심으로 이제 시작하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후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이제는 극장으로 관객들이 장동건을 보러오게 할 자신도 아주 조금 생겼다. 내성적인 편이었는데, 영화로 관객들과 만나며 행복을 느끼는 내 모습을 내가 봐도 신기하다. 배우가 되어 생각과 시야가 한정된 면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세상을 더 넓게 배운다고 생각한다. 연기를 하면서 난 인생을 배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여행〓한 작품을 끝내면 꼭 여행을 간다. 여행은 좋은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97년 친구 한재석(탤런트)과 함께 한달간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왔는데 그때 부쩍 자란 듯한 느낌이 참 좋았다. 죽기 전까지 지구 땅 덩어리를 다 밟아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아직 가보지 못한 대륙은 남미와 아프리카다.
●친구들〓탤런트 한재석 박철 정준호와 친하고 요즘은 이정재와도 친하다. 선의의 경쟁자들인데, 함께 있으면 우리가 어른이 되는구나, 그런 느낌이 진하게 온다. 나는 친구들과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하면서 술마시는 거 좋아한다. 아쉽게도 내 주변엔 목숨 걸고 술먹는 사람이 더 많지만….
●농구〓오랜만에 만난 고교동창들은 전부 나를 “농구 잘하는 애”로 기억한다. 내성적인 편인데 운동회날만 되면 방방 뜨는…. 예전에는 곧잘 새벽에 한강 고수부지에서 농구를 했는데 요즘은 그게 잘 안돼 아쉽다. 요즘 시간나면 하는 것? 인터넷 게임이다.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