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문학에서 로저 젤라즈니는 특이한 위치에 속한 작가다.
SF를 쓰는 작가는 웬만해선 자신의 캐릭터에게 빛의 속도를 넘어 여행하게 하지 않는다. 굳이 그런 다급한 속도가 필요해지면 외계인의 우주선을 빌리거나(래리 니븐의 ‘링월드’), 맹랑한 의사과학을 동원하거나(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그냥 빨간 단추를 누른 다음 휙 날아가버린다(‘스타워즈’ ‘스타트랙’ 등).
반면에 판타지 작가에게 그의 용감한 전사로 하여금 용을 상대로 기관총을 휘두르거나 컴퓨터 공학에 대해 중얼거리게끔 하라고 요구한다면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폭언을 퍼부을 것이다.
하지만 로저 젤라즈니에겐 언제나 캐릭터가 먼저였고 세계가 나중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세계에 종속되는 캐릭터를 창조해내는 대신 자신의 캐릭터가 자유롭게 개성을 펼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해낸다.
그가 주인공을 위해 만들어내는 세계는 어떻게 보면 SF의 분위기를 띄고, 어떻게 보면 판타지의 분위기를 띠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을 찾아본다면 역시 앰버 연대기를 꼽을 수 있다.
앰버란 모든 우주의 근원이며 그것만이 진실한 세계이다. 그리고 지구를 포함한 여러 가지 병행 우주들은 이 앰버가 던지는 그림자들, 즉 가짜 우주다. 이런 가짜 우주들(작품 속에서는 ‘새도우’로 표현된다) 중에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케 하는 것,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만큼이나 초현실적인 것, 혹은 아서왕이 거닐었을 법한 중세세계까지도 있다.
주인공인 코윈은 앰버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지구로 추방된 왕자이며, 다른 앰버의 왕자들과 마찬가지로 마음대로 그림자들 사이를 돌아다닐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코윈은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 앰버의 왕좌를 손에 넣기 위해 인류가 태어나기도 전의 아프리카 해변에서 캐낸 다이아몬드로 자금을 만들고, 현대 세계로 돌아와 총을 만들어 이계(異界)의 괴물로 군대를 조직하고, 아서왕 시대에서 데려온 장수를 부관으로 삼아 앰버로 진격한다. 여기에는 과거, 현재, 외계, 문학적 환상이 총동원된다.
이 정도면 로저 젤라즈니가 캐릭터를 위해 어느 정도의 세계까지 만들어내는지 대충 짐작할 만하다. SF라고 단정짓기도 어렵고 판타지라고 말해버리기도 난감하다. 이 때문에 앰버 연대기는 SF와 판타지 양측에서 명작으로 추앙받는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영도(판타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