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많은 ‘임꺽정’이 있었다. 소설로는 홍명희의 ‘임꺽정’이 우뚝하고, 만화에는 고우영 방학기 그리고 이두호가 ‘임꺽정’을 그렸다. ‘삐리’는 백성민이 그리는 ‘임꺽정’이다.
백성민은 임꺽정의 이야기를 바로 꺼내들지 않고 처용의 노래를 통해 접근해 들어간다. 서얼의 한을 대금에 실은 대금의 명인 여얼은 명나라 칙사에게 아내 취부용을 빼앗기자 대금을 버리고 광대가 되어버린다.
여얼의 가락에 춤을 추던 취부용은 명나라에 가서 단 한번도 춤을 추지 않은 채 재가 되어 여얼 앞에 돌아온다. 여얼은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아내를 황천으로 보내기 위해 다시 대금을 잡는다. 그리고 여얼의 한은 고스란히 여얼의 아들 방울이에게 이어진다.
‘한’이라는 다소 통속적인 단어는 백성민의 만화에서 진정성을 얻는다. 그 진정성은 당대의 사회 문제를 직접 고발하는 소재주의의 한계를 벗어나면서 시작된다.
양반의 압제와 도탄에 빠진 백성, 서얼이나 백정과 같은 천민의 한과 설움이라는 뻔한 구도 대신 그 시대를 살아가는 구체적인 사람들의 삶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생생하다. 삶의 파노라마는 백성민의 붓과 펜을 통해 힘을 얻는다.
붓을 이용한 힘있는 선은 근래 다른 만화가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백성민 만화의 가장 큰 시각적 특징이다.
백성민의 붓은 우직한 소의 힘이, 용맹한 매의 맴돌음이, 이승과 하직하는 광대의 춤사위가, 소를 극락으로 보내는 백정의 신팽이(소를 잡을 때 쓰는 칼)가 된다.
그리고 때론 격정 대신 평범한 조선의 풍광으로도 내려앉는다. 가만히 숨을 고르는 산이 되고, 소리 없이 흐르는 물이 된다. 그리하여 춤을 추듯, 가락을 타고 칸에 내려 앉아 마음 깊은 곳을 두드린다.
‘삐리’는 어린 시절 꺽정과 동무가 된 방울이의 아비인 여얼의 이야기, 연산군 시절 사화를 피해 백정의 딸과 혼인을 올린 홍문관 교리 이장곤의 이야기, 그리고 이장곤의 처삼촌이자 큰 깨달음을 지닌 양주팔과 중종 초기 도덕정치의 실현을 꿈꾸다 사약을 받은 조광조의 이야기를 지나 3권에서 방울이와 꺽정이의 소년 시절을 갈무리한다.
그러나 안타깝게 연재하던 잡지가 휴간하는 바람에 그 뒤가 이어지지 않고 있다. 한 권 한 권, 이런 만화가 쌓여 우리 만화의 거대한 산이 될 것이다. 하루 빨리 백성민의 붓이 방울이와 꺽정이의 이야기를 풀어내기를 바란다.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