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118회에서 궁예가 역사기록과는 다른 '영웅적'인 최후를 맞을 것으로 알려지면서 과연 드라마 중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인지에 대해 관심이 높다.
이 드라마의 작가 이환경씨는 "관련 논문 200여편을 읽었고 '고려사'(조선시대 문종 원년인 1451년에 완성된 역사책)는 내용을 외울 정도"라며 "부족한 기록탓에 상상으로 꾸민 부분도 많지만 역사적 사실의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왕건 평전인 '태조 왕건'을 쓴 대전대 김갑동 교수와 '슬픈 궁예'의 저자 경기대 이재범 교수의 도움을 받아 이 드라마의 '사실'(Fact)과 '허구'(Fiction)를 알아본다.
●궁예는 자살했을까〓‘고려사’에 따른 정설은 ‘궁예가 궁궐에서 쫓겨나 보리 이삭을 주워먹다가 백성들에게 맞아죽었다’는 것. 그러나 이환경씨는 “드라마의 극적 재미를 위해 궁예가 왕건이 보는 앞에서 죽는 것으로 하되, 측근에 의해 명예롭게 죽는 ‘간접 자살’로 처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재범 교수는 “철원 일대에서는 궁예가 자살했다는 전설도 내려온다”며 이같은 결말을 뒷받침했다.
●궁예는 과연 미쳤었나〓드라마에서는 궁예가 독화살을 맞은 뒤 그 후유증으로 미쳐가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독화살 부분은 100% 허구. ‘고려사’와 ‘삼국사기’에는 각각 ‘광폭해졌다’ ‘궁예가 포악해져 날이 갈수록 군심(群心)이 홀변했다’고 돼 있을 뿐 ‘미쳤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다. 또 드라마에서 궁예가 술에 의존하는 것과 달리 실제 역사기록에서는 ‘주색(酒色)’과 관련된 내용이 전혀 없어 ‘금욕적’인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화는 왕건의 정혼녀였을까〓역사서에는 궁예의 부인이 ‘강씨 부인’이라고만 언급돼 있다. ‘연화’라는 이름과 정혼녀였다는 설정은 모두 작가의 창작. ‘삼국사기’ ‘고려사’ 등은 ‘강씨부인’이 음행을 저지르자 궁예가 달군 쇠로 찔러 죽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연화는 끝까지 정숙한 여인으로 그려진다. 강씨부인은 궁예가 친정 아버지 강장자를 죽이자 남편에게 미련이 없어져 왕자를 보위에 올리려다 발각돼 죽는 것으로 처리된다.
●종간은 실존인물일까〓이환경씨는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공의 인물은 단 한명도 없다”고 말한다.
‘내원’ 종간은 ‘고려사’에는 한 번만 이름이 언급된 인물을 작가가 상상력으로 ‘키웠다’. 종간의 실제 직책은 중상위 서열 정도인 ‘소판(蘇判)’이었다. 작가는 궁예가 내쫓긴 후 가장 먼저 처형된 인물이 종간과 은부였다는 기록에 주목, 그가 그만큼 궁예에게 심리적으로 가까운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해 ‘충복’으로 되살려냈다.
아지태는 ‘고려사’에 부정적인 인물로 열 줄가량 언급돼 있는 것으로 보아 비중이 적은 인물은 아니었지만 드라마처럼 ‘대역’을 도모하려 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작가는 아지태에게 죽기 직전 연화와 왕건의 관계, 태자의 태생에 대한 의혹을 제기해 궁예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역할을 맡겼다.
궁예에게 “미륵이 아니다”라고 직언했다가 살해된 석총 역시 실존 인물.
●아자개와 견훤은 사이가 나빴을까〓부자지간인 아자개와 견훤이 사이가 나빴다는 기록은 단 한 줄도 없다. 하지만 왕건이 즉위하던 해, 아자개가 아들 견훤이 백제의 왕인데도 불구하고 왕건에게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근거로 많은 역사학자들도 견훤과 아자개가 사이가 안 좋았을 것이라는 추측에 동의한다. 양념으로 들어가있는 견훤의 여동생 대주와 왕건의 부하 박술희 장군의 사랑얘기는 허구지만 두 사람 모두 실존인물이었다.
●남동풍은 불었을까〓왕건이 견훤과의 나주전투 중 압권이었던 남동풍을 이용한 화공(火攻). 역사서에는 “바람으로 화공을 써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돼 있을뿐 구체적으로 ‘남동풍’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작가는 당시 왕건 군대가 있던 곳의 바람 방향을 기상청에 문의한 결과 “북서풍이 불다가 삼한사온의 마지막 날에 역풍이 불곤한다”는 설명을 듣고 ‘남동풍’ 부분을 넣었다. 태평이 바람을 부르는 부분은 물론 허구다.
<강수진기자>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