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한 카페.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던 기자에게, 이영애가 화사하게 웃으며 다가오더니 웬걸, 먼저 악수를 청한다. 그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사진촬영을 위해 준비해온 옷들을 꺼내며 “어때요? 봄 분위기 나는 옷이 좋겠죠?”하고 사근사근하게 묻는다. 어, 예상과 다르네…. 얄팍한 선입견이 깨지는 즐거운 느낌.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찬욱 감독이 이영애를 두고 한 말이 생각났다. “생긴 건 춘향인데 하는 짓은 향단이”라고. 그 말을 전해주니 “제가 차갑게 보이나 보죠? 그렇게들 생각하다가 절 만나면, 안그러니까 신기해 하는 것 같아요”하며 웃는다.
요즘 이영애는 물을 만난 물고기같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끝낸뒤 곧바로 ‘선물’에 출연했고, 이 영화를 끝내자마자 ‘봄날은 간다’ 촬영을 시작했다. 지금 전파를 타는 CF만 해도 8개. 비슷한 위치의 여배우들 중에선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는 셈이다.
그는 96년 첫 영화 ‘인샬라’의 흥행 참패후 “영화를 섣불리 하고 싶지 않아서” 느낌이 오는 영화를 오래도록 기다렸다. 그렇게 해서 만난 ‘공동경비구역 JSA’는 그에게 “두 번 다시 만나기 어려울 행운” 같은 영화. 그러나 그는 황홀함에 도취해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자신을 다잡으려 애썼다. ‘선물’ ‘봄날은 간다’를 준비하기 위해 ‘공동경비구역 JSA’가 경쟁부문에 진출한 베를린 영화제에도 처음엔 가지 않으려 했었다고.
24일 개봉될 ‘선물’에서 그는 예쁘게 보이려는 욕심없이, 화장기 없는 얼굴로 죽음을 준비하는 아내 역을 연기하며 보는 이의 눈물샘을 건드린다. “연기가 아주 좋다”는 덕담에 그가 정색을 하고 대답한다.
“배우 혼자 연기를 잘한다는 건 좀 말이 안돼요. 연기자는 ‘감독의 악기’같아요. 아무리 배우가 튀어도 영화가 엉망이면 배우도 죽고, 평범한 역을 맡아도 작품이 살면 배우도 함께 사는 거죠.”
‘개인’을 칭찬해도 굳이 ‘전체’에 공을 돌리는 태도가 괜한 겸손같지 않다. 그는 “갈수록 ‘내가 작품을 한다’는 생각보다, ‘내가 감독과의 조화를 통해 작품을 이룬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렇게 작품을 이루어갈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 요즘이 가장 행복한 때라고 하면서도 “사실 ‘가장’ 행복하거나 힘들 때가 있겠어요. 다 상대적인 거지…. 자기 마음이 천국이잖아요”하고 덧붙인다.
“말하는 게 꼭 득도한 사람 같다”고 하자 민망한 듯 웃는다.
“아니, 이쪽 직업에선 그런 마음이 정말 중요해요. 주변에서들 ‘넌 최고야’하고 부추기는데, 자기가 정말 그런 줄 알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어느날 갑자기 구멍난 풍선처럼 추락하고 황폐해지니까….”
책 많이 읽기로 소문난 그가 요즘 보는 책은 일본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
“촬영 준비할 때 다른 영화를 보면 알게 모르게 흉내낼 것 같아서 그 보다는 책을 보는 편”이라고. ‘봄날은 간다’의 감정을 익히려고 ‘냉정과 열정사이’를 읽고, ‘선물’ 촬영할 때에는 ‘국화꽃 향기’ ‘가시고기’를 읽었다고 한다.
가장 좋아하는 일은 여행. 얼마전에도 네팔, 인도에 다녀온 그가 세운 여행의 원칙은 빡빡한 일정에 쫓기기보다 흘러가듯 가야 한다는 것.
“사는 것도 그렇게 흘러가듯 살았으면 좋겠어요. ‘난 뭐가 될거야’하는 욕심 부리지 않고, 좋은 사람들 만나는 거 감사해 하면서, 편안하게 흐르듯….”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