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이라는 영화로 '에로 소설의 대가' 헨리 밀러를 돌아봤던 필립 카우프먼 감독은 2001년, 더 오랜 역사 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폴레옹이 지배했던 18세기 프랑스. 사디즘(Sadism, 성적 대상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인 쾌감을 얻음)의 어원이 될만큼 엽기적이었던 사드 후작의 삶에 촉수를 들이댄 것이다.
카우프만의 <퀼스>는 어느 모로 보나 사드 후작(제프리 러시)의 전기영화는 아니다. 그는 사드의 삶 전체가 아니라 샤렝턴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던 약 10년의 시간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그랬듯 카우프만도 역사적 사실을 빛나는 상상력으로 재가공한다. 기본 뼈대만 역사적 사실로 남겨둔 채 적당한 로맨스와 광기를 뒤섞어 환상적인 새 살을 덧붙인 것이다.
원래 120cm 키의 곱추였던 쿨미어 신부(호아킨 피닉스)는 매력적인 미남으로 변신했고 정신병원 세탁부에서 일하며 규칙적으로 사드를 방문했다고 알려진 17세 소녀 마들렌(케이트 윈슬렛)은 사드에게 마음을 빼앗긴 여성으로 둔갑했다.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이 영화의 각본을 담당한 덕 라이트는 "사드에 대해 알려진 어설픈 자료를 나열하기보단 그의 영혼에 담긴 어두운 악의 미학을 표현해보고 싶었노라"고 설명했다.
인간 내면의 본능에 더 귀기울여야 할 이 영화는 사드 후작을 일종의 '투사'로 묘사하고 있다. 사드에 대한 역사적 견해는 많이 갈리고 있지만 적어도 필립 카우프먼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덕 라이트는 사드를 도덕적 투사로 바라본 것 같다.
<퀼스>에서 사드는 샤렝턴 병원에 수감되었던 시절에도 여전히 펜대를 놓지 않았다. 펜이 될 만한 모든 것을 활용해 에로틱한 글을 썼고 이 글은 사드 소설의 열렬한 팬인 세탁부 여성 마들렌의 손을 거쳐 세상에 전파되었다. 사드는 가끔 소설을 무기 삼아 마들렌을 능욕했으나 정작 마들렌의 마음은 샤렝턴 병원을 운영하는 젊은 신부 쿨미어에 가 있었다. 쿨미어는 이 영화에서 마들렌에 대한 성적 본능과 신부의 계율 사이에서 방황하는 아주 인간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퀼스>는 이렇듯 '있을 법하지만 실제로는 벌어지지 않았던' 가공의 러브 스토리를 꾸며낸다. 그 속에서 사드의 소설이 18세기 프랑스 서민들에게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핍박 속에 살았던 사드가 세상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반항하고 어떻게 냉소를 던졌는지를 보여준다.
글을 쓸 수 있는 모든 걸 빼앗긴 사드가 자신의 배설물까지 이용해 글을 써대는 모습은 투사 이전에 정신병적 징후마저 느끼게 해준다. 아마도 이런 정신병적 징후가 사드로 하여금 펜대 하나로 세상을 들썩이게 만들 힘을 주지는 않았을까.
<퀼스>는 역사적 사실을 판타지 속에 빠뜨렸지만 그렇기에 이성주의자들에게 더 충격적으로 다가갈 만하다. 도덕과 본능, 억압과 자유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숙명이 이 한 편의 가상 역사극 안에 완곡히 녹아들어 있다.
영화는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 덕분에 더 빛을 발한다. 사드 후작을 연기한 제프리 러시는 <샤인>에 이어 예술가의 광기를 노련한 연기로 승화시켰으며, 고전 의상이 잘 어울리는 케이트 윈슬렛은 르느와르 화폭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매혹적인 자태로 영화에 향기를 더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배우는 뭐니뭐니 해도 쿨미어 신부 역의 호아킨 피닉스. 도덕과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는 쿨미어 신부는 우리와 너무 닮은 모습이기에 더욱 정이 간다.
<퀼스>는 전미 비평가 협회 선정 2000년 최고의 영화로 선정되었으며 현재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미술상, 의상상에 노미네이트되어 있다.
(원제 Quills/감독 필립 카우프먼/주연 제프리 러시, 케이트 윈슬렛, 호아킨 피닉스, 마이클 케인/등급 18세 이용가)
황희연<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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