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대중문화 째려보기]하루란 무엇인가?

  • 입력 2001년 3월 23일 17시 11분


▲의 박혜경
▲<하루>의 박혜경
같은 제목의 다른 노래들이 동시에 방송을 타는 경우가 늘었습니다. 차태현과 포지션은 'I Love You'라는 노래로 동시에 뮤직 챠트 1위 후보에 오르는군요.

예전에는 비슷한 분위기의 노래나 영화가 동시에 발표되면 인기가 반감된다고 생각했었고, 또 그런 일도 실제로 몇 차례 있었습니다. '신장개업'과 '북경반점'이 떠오르네요. 그러나 이제는 자기 색깔만 확실히 낼 수 있다면 제목이 같더라도 상관하지 않는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어차피 사랑 노래를 부른다면 그 속에서 택할 제목이나 소재들도 제한적이기 마련이니까요.

'하루'란 노래를 아침저녁으로 따라 부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개봉되었던 이성재, 고소영 주연의 영화 '하루'까지 합치면, 무려 세 팀에서 '하루'에 매달리고 있군요. 나날이 변하는 속도의 시대에 대비하기 위함일까요? 아니면 낮과 밤의 교체와 함께 24시간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하루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반복 단위이기 때문일까요?

먼저 박혜경의 '하루'를 듣습니다. 'The The' 시절의 'Delight'와 '내게 다시', 솔로 1집에서의 히트곡 '고백'은 모두 경쾌한 리듬의 모던록이었지요. 그동안 저는 그녀의 목소리가 푸른 초원을 즐겁게 달려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같다고 여겼습니다. 아무리 울상을 짓더라도 슬픔을 느낄 수 없는 팅커벨처럼.

그러나 '하루'를 들으며 그 선입견을 고쳤습니다. 흐느끼지 않더라도 아픔을 드러낼 수 있고, 절규하지 않더라도 고통을 전할 수 있음을 그녀의 여리고 약간씩 떨리는 음성을 통해 확인한 것이죠. '맑은 슬픔'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단정하면서도 선명한 자기 고백이 오랫동안 가슴을 떠나지 않습니다.

김범수의 '하루'는 들었다기보다는 보았다는 표현이 맞겠군요. 물론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을 리바이벌 하기도 했던 김범수의 곡 해석 능력과 애절한 가사도 훌륭하지만, 역시 송혜교와 송승헌의 뮤직비디오가 눈길을 끕니다. 두 가지를 동시에 못하는 아둔한 습성 때문인지, 저는 스토리가 있는 뮤직비디오를 보고 있노라면 가사가 잘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송혜교에 대한 송승헌의 짝사랑, 사고로 애인을 잃은 송혜교의 슬픔과 절망, 그런 송혜교를 바라보는 송승헌의 안타까움, 애인처럼 죽기로 결심하고 경비행기에 오르는 송혜교의 크고 아득한 눈, 그리고 송혜교의 죽음 앞에서 울음을 쏟는 송승헌. 김범수의 '하루'는 그렇게 친구와 사랑을 떠나보낸 다음부터 송승헌이 간직한 삶의 비애를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김범수 노래듣기

  - 비처럼 음악처럼
  - 하루

박혜경도 김범수도 실연 이후를 노래하는군요. 김범수는 그 아픔을 잊지 못한 채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가네요"라고 고백하며, 박혜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말 사랑했는데 / 슬픈 하루가 가죠 / 단 하루도 안될 것 같더니" 라며 "그대 없이도 또 하루를 산" 자신을 "참 나쁘죠"라고 자책하기까지 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억과 망각의 문제이겠군요. 김범수의 '하루'는 "잔인하게 떠나간" 사랑을 향한 그 아픈 기억을 여전히 쥐고 있고, 박혜경의 '하루' 역시 망각을 자책하는 것으로 기억의 소중함을 일깨웁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잃은 존재에게 '하루'란 망각을 이기고 기억을 통해 사랑을 이어가는 최소 단위이겠군요. 그러나 과연 그 하루가 영원히 이어질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다시 사랑을 하고 또 실연을 당하거나 결혼을 하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의 한 때 하루 온 종일 떠나간 사랑을 그리워했다고 추억할 수는 있겠군요. 그 하루를 기억하는 또 다른 하루, 그것이 어쩌면 사랑을 잃고도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우리들 생의 버팀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가 김탁환(건양대 교수) tagtag@kytis.konyang.ac.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