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음식점 찾아다니고, 바닷가에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하고, 심지어는 케이블카 타고 설악산 권금성엘 오르기도 했었다.
그때 그렇게 어슬렁대다가 시내 책방 한 귀퉁이에서 우연히 발견한 흥미로운 책이 한 권 있다. ‘변태:미국인들의 숨겨진 성생활’(수잔 크레인 베이코스 지음, 김은수 옮김, 1995년, 출판사 가서원).
책은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 ‘30년 전만 해도 오랄섹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변태적인 행위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요즘 이성애자들끼리 항문섹스를 하는 사람들이 늘기는 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그걸 끔찍하게 여긴다. 하지만 앞으로 30년 후에는….’
그러니까 소위 변태 행위에 대해 아주 열린 시각으로 접근하는 이 책은 변태 성욕자들의 클럽을 직접 방문해서 본 것들, 그들과 인터뷰한 내용들로 거의 채워져 있었다.
묶어놓고 자극하기, 엉덩이 때리기, 전희(前戱)로서의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가학,피학성 변태 성욕), 본격적인 사도마조히즘, 집단 혼음, 비디오로 찍어 돌려보기, 발 페티시즘(Fetishism·신체 일부에 집착하는 변태 성욕), 의상 도착(倒錯) 등을 차근차근 섭렵하는 이 책은 상당히 엽기적이며 에로틱하다.
하지만 인터뷰에 응하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소위 변태 성욕자들의 수줍은 고백 속에서 저자는 그들만의 고뇌를 읽어내기도 한다.
청소년기 부터 자신의 변태적(?) 욕망과 싸우며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한 의상도착증 청년의 고백은 자못 슬프기까지 하다.
그는 서른 중반이 되도록 그런 노력과 좌절을 끊임없이 반복했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러 “오, 제기랄, 이건 나의 일부야”하는 포기 또는 깨달음을 갖게 됐고, 그리고는 여장을 하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않고 사는 법을 배우게 됐다는 거다.
내가 책을 읽으며 감탄했던 것 중 하나는 저자의 성실성이다. 전미 대륙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직접 그들을 만나서 얘기하고 듣고 느껴야 직성이 풀리는 그 성실성. 그렇지만 그런 성실성은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호기심, 애정 어린 관심, 즉 측은지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그 속을 알 수 없는 가엾은 생물체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이냐?’하는.
이 책은 무릇 모든 종류의 작가라는 작자들이 지녀야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내게 새삼 일깨워 준 셈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지금 이 책을 시중에서 구할 수 없을지 모른다. 책은 출간된 직후 지레 겁(!)을 먹은 출판사에 의해서 자진 회수되었다는 뒷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 자진 회수의 힘이 속초의 작은 책방까지는 미치지 못했다는 게 내가 이 흥미롭고도 귀중한 책을 읽게 된 연유이고. <영화감독>
namus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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