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대중문화 째려보기]우리가 남이 아니면 무엇인가?

  • 입력 2001년 4월 2일 09시 33분


KBS 1TV의 일일 연속극 '우리가 남인가요?'는 방영을 시작하기도 전에 제목에서부터 묘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1992년 겨울, 김영삼 후보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경북 출신의 모정치인이 사투리로 내뱉었다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물음을 드라마의 제목으로 고스란히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때는 경남 출신의 김영삼 후보를 경북 사람들이 지지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그로부터 9년이 지난 지금 일일연속극에서 이 물음을 던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정치적인 계산은 없겠으나 슬그머니 그 물음의 답을 찾고 싶어진다.

'우리가 남인가요?'라는 물음은 우리가 남이 아님을 강조하는 물음이다. 아니 물음이라기보다는 적극적인 동의를 구하는 방편이겠다. 남이 아니라는 것은 곧 나 자신이라는 것, 혹은 나 자신만큼 가까운 가족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3월 내내 이 드라마는 우리가 남이 아니라는 제목과는 달리 우리는 틀림없이 남이라는 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연상녀 연하남 커플인 배종옥과 김호진의 사랑이 친남매 의 사랑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아직 대한민국 공중파에서(그것도 공영방송인 KBS에서) 이복남매끼리의 근친애가, 더군다나 온 가족이 시청하는 8시 30분 대의 일일연속극에서, 허락될 리 만무하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들은 결코 피를 나눈 사이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이 뻔한 오해(극중 인물들 외에 그 어느 시청자도 그들이 이복남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를 부풀리고 비틀면서 3월 한 달이 다 지나갔다.

다시 생각해보자. 처음부터 남이 아니었다면 구태여 '우리가 남인가요?'라고 물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과거 한때 우리가 남인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런 거리감을 극복하였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난 3월은 이 물음을 던지기 위한 전제, 즉 우리가 틀림없이 남이라는 것을 시청자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또다시 생각해보자. 4월로 접어드니, 갑자기 이 드라마 자체가 시시해진다. 이제 주현 집안과 이정길 집안이 '우리가 남인가요?'라며 가족임을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집안끼리 사돈이 되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우여곡절이 있겠으나 결국 드라마의 제목에 어울리는 내용이 되려면 배종옥과 김호진이 결혼에 골인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그외에 다른 대안이 있을까? 아무리 따져보아도 요즘 유행하는 제3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한 번만 더 생각해보자. 그래 좋다, 끝이 보이는 드라마가 어디 이 작품뿐이었나? 같은 시간대에 방송되는 MBC의 '온달왕자들'도 결말을 가늠할 수 있기는 마찬가지다. 일일드라마란 행복한 결말을 알면서도 보고 또 보게 되는 독특한 중독성이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 드라마나 푹 빠져드는 건 아니다. 등장인물들의 생생한 연기와 아기자기한 이야기 전개가 없다면, 같은 시간대의 다른 방송국 일일드라마에게 시청자를 빼앗길 수밖에 없다.

정말 마지막으로 생각해보자.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아쉬운 것은 배종옥의 어정쩡한 연기다. '목욕탕집 남자들'에서의 경쾌함과 당당함, '거짓말'에서의 깊은 슬픔, '바보같은 사랑'에서의 순진무구함 중 어느 것도 찾아보기 힘들다. 제목도 중요하고 극의 구성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들은 주인공의 연기를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다. 배종옥은 다양한 성격을 표출할 수 있는 뛰어난 연기자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신인연기자처럼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다. 이것은 그녀의 연기력이 부족하다기보다는 이전 드라마에서 맡은 역할들(전문직 여성, 연하남과의 사랑, 사랑에 대한 맹목)이 반복되면서 그녀의 연기가 매너리즘으로 빠져드는 징후가 아닐까?

생각 없이 고백하겠다. 정보석과 함께 출연했던 영화 '젊은 날의 초상'에서, 배종옥은 내 꿈에 다시 나타날 만큼 정말 아름다운 작부였다. 배종옥을 '우리가 남인가요?'나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를 통해 매일 보는 것도 즐겁지만, 한 번 쯤은 그녀가 심혜진이나 고소영처럼, 할 수만 있다면 자신만의 여유를 갖고 영화로 돌아오는 게 어떨까? 그래서 나는 감히 그녀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배종옥이 배종옥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이렇게까지 그녀를 아끼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를 보면 80년대의 흘러간 내 청춘이 떠오르고, 덧붙여 배종옥이 배종옥이 아닐 때면 나도 내가 아닌 듯하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탁환(건양대 교수) tagtag@kytis.ko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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