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괴성을 지르며 춤추는 무대 한복판. 얌전한 교복 차림의 남녀가 눈에 들어온다. 수줍은 듯 어색하게 서있던 여자는 어느새 두 팔을 치켜올리나 싶더니 고무공처럼 튕겨 올랐다. 그리고 얌전한 교복이 무색할 만큼 농염한 춤사위를 보여줬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긴 생머리를 휘날리느라 땀범벅이가 된 얼굴이 왠지 익숙하다. 30, 40대 남성들에게까지 테크노댄스 리듬을 깊숙이 새겨준 그 여자, 전지현이다.
그 옆에서 검정색 옛날 교복을 입고 춤을 추는 남자는 애드립 연기의 황태자 차태현. 최근 가수로까지 데뷔한 그가 어설픈 ‘막춤’을 추다가 나중엔 무대 바닥을 긴다.
두 사람은 주변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나올 만큼 무아지경의 춤 솜씨를 선보였다. 바로 그 순간 머리위로 두 팔을 저으며 ‘컷, 컷’을 외치는 남자가 무대로 뛰어들었다.
“춤은 좋았는데 필름이 안돌아 갔어.”
춤을 멈춘 전지현은 금새 울먹일 듯한 표정이 된다.
갑자기 뛰어든 남자는 영화 ‘비 오는 날의 수채화’로 유명한 곽재용 감독. 곽 감독은 이날 나이트클럽을 빌려 새 영화 ‘엽기적 그녀’를 찍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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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태현과 전지현은 영화 ‘엽기적 그녀’의 두 주인공. 차태현은 영화에서 순진남 견우로, 전지현은 엽기녀로 나온다. 이날 촬영한 장면은 이들이 만난지 100일되는 날을 기념해 고교시절 입었던 교복 차림으로 나이트클럽을 찾아 춤을 추는 장면이었다.
무대에서 춤추던 100여명은 인터넷을 통해 들러리를 자원하고 나선 일반인들. 테이블 위의 술과 안주들은 전날밤 나이트클럽 손님들이 남기고 간 것을 그대로 재활용했다.
곽 감독이 촬영을 중단한 것은 ‘슈팅’ 사인(촬영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묻히는 바람에 미처 필름이 돌아가지 않았던 때문. 곽감독은 이를 뒤늦게 알고 뛰어든 것이었다.
“아이고 힘들다”를 연발하며 다리를 두드리던 전지현과 ‘허, 참’이라며 특유의 허탈한 웃음을 흘리던 차태현은 20분 후 다시 무대 위에 섰다.
촬영 스탭들은 서둘러 무대를 다시 준비했다. 조명이 좀 더 또렷하게 잡히도록 하기 위해 스모그가 잔뜩 뿌려졌다.
카메라는 6m 길이에 360도 회전 가능한 특수촬영장비 ‘지미집’이 무대 바로 앞 어둠 속에 웅크려 있고 오른쪽에는 또 한대의 고정 카메라가 무대 중앙을 응시하고 있다.
두번째 촬영에는 아예 음악소리를 ‘슈팅’ 신호로 삼았다.
음악소리에 맞춰 어둠을 헤치고 서서히 거구를 드러낸 지미집은 상하좌우로 몸을 비틀며 전지현과 차태현의 춤동작을 훑어 낸다. 하지만 카메라에 머리를 부딪히는 엑스트라가 나오고, 헤드스핀까지 시도하던 차태현은 에너지를 소진한 나머지 무대 바닥에 널브러졌다. 토끼춤 말춤에 싸이의 ‘새’춤까지 구사하던 전지현도 끝내 쓰러졌다.
“어휴, 슈퍼 크랭크인(카메라맨을 의자에 태운 채 이동시키는 대형 촬영장비)을 쓰지 않기를 잘했지. 저 빠른 춤동작을 다 어떻게 잡아냈겠어.”
김성복 촬영감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곽재용 감독은 “역시 첫번째 걸 찍었어야 했는데”라며 아쉬운 듯 담배를 피워 문다.
곽 감독은 촬영이 마음에 들지 않자 마침내 세번째 촬영 지시를 내린다. 점심 식사를 햄버거로 때운 뒤 이뤄진 세번째 촬영이 끝났다. 온 몸이 땀범벅이 된 전지현은 세번째 촬영이 끝난 뒤 ‘한번 더’냐는 눈빛으로 감독에게 검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곽감독은 씩 웃으며 “아니, 됐어”라는 말로 OK사인을 보냈다. 이 시각이 오후 3시. 영화 속 1분 여의 장면을 찍기 위해 3시간반이 화살처럼 지나갔다.
순수함으로 가득찬 남자가 온갖 기행을 일삼는 ‘엽기 여성’과 불가능에 가까운 사랑을 완성해간다는 내용을 담은 이 영화는 7월 개봉될 예정이다.
<권재현기자>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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