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인터뷰]<소름>의 장진영 "4개월간 날 잊었어요"

  • 입력 2001년 4월 19일 18시 52분


'긴 생머리에 날씬한 몸매, 서구적인 마스크, 화사한 미소.'

그동안 드라마나 CF에서 접해왔던 장진영(26)의 모습을 설명하는 데는 대개 이런 수식어가 필요했다. 사실 여자 연기자에 대한 이런 류의 수식어는 그녀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대놓고 말하면 9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이른바 '신세대'란 수식어가 붙은 여자 연예인들을 설명할 땐 거의 대부분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 결국 '아름다움과 매력의 스테레오타입화'란 말인데….

물론 그 나름대로 장점은 있다. 첫 눈에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고 친숙하고 편하게 와닿는다는 점. 하지만 쉽게 알려지고 쉽게 기억된 만큼 실증을 내고 잊혀지는 것도 빠르다. 실제로 많은 신세대 유망주들이 등장한지 1-2년 후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스타로서 부상하는 속도도 빨랐지만, 그만큼 인기의 생명주기도 짧았던 것.

장진영도 어느 순간부터 드라마에서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녀 역시 다른 신세대 스타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운명을 걷게 됐나? 그런데 안방극장에서 그녀의 모습이 안보이는 대신, 우리는 극장의 스크린에서 '영화배우' 장진영을 만날 수 있었다.

큰 스크린에 비쳐진 그녀의 모습은 예전의 텔레비전에서 보던 CF 요정의 화사함과는 사뭇 거리가 있었다. <반칙왕>에서 레스링에 입문하고자 도장을 찾아온 송강호를 맞은 장진영. 긴 생머리는 간편하게 뒤로 묶었고, 화장기 하나 없는, 어찌보면 심심한 얼굴로 등장한다. 그렇다고 행동이나 표정이 발랄하고 애교가 넘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무뚝뚝하고 무덤덤하다. 그동안 CF에서 봤던 '만인의 연인' 같은 고혹적인 분위기와는 정반대이다.

하지만 '핀업 스타'의 천편일률적인 매력을 버린 대신 그녀는 비로소 '연기자 장진영'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지난 13일 신작 영화 <소름>의 촬영을 마친 장진영을 만났다. MBC 공채 탤런트 출신의 김명민과 함께 출연한 영화 <소름>은 독특한 미스테리 스릴러이다. 서울 변두리 한 아파트를 배경으로 현실에 지치고 소외된 사람들이 뒤엉키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리고 있다.

그녀가 이 영화에서 맡은 인물은 선영. 하나뿐인 아이의 실종과 남편의 습관적인 폭력, 생활고 사이에서 허덕이며 사는 인생 막장에 들어선 것 같은 여인이다. 평소에는 현실적이고 양심적이지만 때로는 병적으로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예측불허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배우로서 욕심이 생기는 매력적인 성격이지만, 그냥 대사 외우고 찡그린 표정 짓는 것으로 연기가 끝나는 간단한 인물은 아니다.

그녀에게 영화 촬영이 끝난 지금 자신이 맡은 선영이란 인물에 대한 느낌을 물어봤다.

"정말 지겹고 가슴이 답답하도록 부담스런 인물이에요. 저 같으면 그렇게는 도저히 못 살 것 같아요. 촬영 내내 힘들었고 나중에는 집에서 잘 때도 가위에 눌려 악몽을 꾸곤 했어요."

하긴, 인터뷰에 나온 그녀의 모습을 보니 지겹다는 말이 나올만 했다. 트레이드 마크인 긴 생머리를 싹둑 잘라버리고, 마치 TV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듯한 조금 신기한 산발머리이다. 통통하던 볼살도 쏙 빠졌다. 그나마 촬영이 끝난 후 인터뷰나 사진촬영을 위해 손질한 모습이라고 했다.

그녀는 <소름>을 촬영하는 4개월 동안 내내 부스스한 단발 머리에 화장기 하나 없는 모습으로 지냈다. 연기하는 내내 절망적인 선영의 삶을 상징하는 줄담배를 연기하기 위해 하루에 담배를 3갑 이상 폈다. 어쩌면 위험하고 거친 액션을 연기하는 것보다 이렇게 탈출구 없는 삶을 사는 여인의 속내에서 넉달간 지내는 것이 훨씬 고달플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그녀 스스로 "영화 촬영이 끝나니까 체중 빠지고 피부 상하고 의욕상실에 걸렸어요."라고 말할까?

하지만 그녀의 이 말 속에는 불만이나 후회 보다는 연기자로서 쉽지 않은 인물을 해냈다는 뿌듯한 만족감이 배어 있었다.

당초 <소름>에서 그녀는 가발을 쓰고 연기할 예정이었다. 화장품 전속모델인 상황에서 머리를 그렇게 무지막지한 단발로 자르기가 어려웠던 것. 하지만 테스트 촬영 이후 그녀는 머리를 자르기로 결심했다. "가발로는 전혀 느낌이 살지 않았어요. 일단 영화가 잘되고 봐야죠." 그래서 광고주를 직접 찾아가 설득한 후 머리를 잘랐다. "그러니 영화가 잘 돼야 되요. 그렇지 않으면 저 모델에서 잘릴지도 몰라요."

흔히 이처럼 까탈스러운 역할을 맡게 됐을 때 많은 연기자들은 사전에 미리 준비를 한다. 비슷한 성격의 인물이 나오는 영화나 연극을 보거나, 때로는 선배 연기자로부터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아직은 완성된 자기 연기 스타일을 갖지 못한 상황에서는 그런 '케이스 스터디'가 더욱 절실하다. 그녀에게 연기에 참고를 한 작품이나 연기자를 물었다.

"없어요." 너무 간단하게 나오는 대답이 의외였다.

"특별히 참고하거나 미리 공부를 한 것이 전혀 없어요. <소름>의 윤종찬 감독이 기존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전형적인 감정표현을 원치 않아 그때 그때 현장에서 감독과 이야기를 통해 연기의 방향을 정했어요."

단지 참고한 작품이 있다면 윤종찬 감독의 만든 단편 <메멘토> 정도. 그녀는 현장에서 감독의 느낌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시나리오를 두고 매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서 복잡한 주인공의 내면을 연기했다고 한다.

선영을 두고 "지겹다"고 말한 장진영의 표현이 새롭게 와닿았다.

그냥 편하게 연기할 수도 있는데 뭐하러 그녀는 모델에서 잘릴 위험을 무릅쓰고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할까?

"우연치 않게 학교를 졸업하고 연기에 입문했어요. 처음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지만, 점차 저 자신에게 실망이 되더라구요. '내가 이 정도 밖에 안되나'라는 것이죠. 더 늦기 전에 연기자로서 후회없이 해보고 싶었어요. 지금은 '내가 왜 진작 이렇게 안했었나'라는 후회가 들 정도로 너무 좋아요."

끝으로 그녀에게 다음에도 이렇게 느낌이 강한 역할을 연기하고 싶은지 물었다.

"다음에는 예쁜 멜로물을 하고 싶어요. 더 늦기 전에 가볍고 밝고 그리고 예쁘게 보이는 인물을 딱 한번 연기하고 싶거든요. 휴, 선영같은 인물은 당분간 사양하고 싶어요."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 oldfie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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