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메이크란 것은 말 그대로 예전에 창작된 노래를 재창작한다는 뜻이겠지요. 우리가 역사를 되돌아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현재의 우리가 결코 과거의 우리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 미래의 우리를 확신할 수 없을 때는 과거의 우리를 통해 그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김광석의 '다시부르기' 앨범이나 안치환의 '노스텔지어' 앨범은 목적의식적으로 자신들이 추구할 음악세계를 기존 노래들을 통해 확인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김광석이 양병집이나 김목경의 노래를 다시 부르고 안치환이 '타는 목마름으로'나 '친구에게'를 어쿠스틱 기타 선율에 어울리도록 편곡하는 노력은 그들의 삶과 고뇌가 그 속에 녹아 있기에 소중한 것입니다. 특히 저는 안치환의 목소리로 듣는 '영산강'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차라리 울어 볼거나 이 칙칙한 어둠 몰고
소리 없이 숨죽여 울어 볼거나
차라리 돌아설거나, 무너져 내린 설움 안고
여윈 허리 보둠어 돌아설거나
밤마다 산마루 넘어와서 시꺼멓게 다가와
손 내미는 못다한 세월
015B의 리더였던 정석원이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리메이크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절대음을 추구한 조용필의 음악은 정석원이나 신해철에게는 넘어서기 힘든 또 하나의 경지였지요. '단발머리'의 첫부분에 나오는 "뿅 뿅 뿅" 하는 전자음을 찾지 못해 낙원상가를 여러 날 헤매다녔다는 정석원의 고백을 들으며, 저는 리메이크라는 것이 음악을 통해 예술가와 예술가가 세대를 뛰어넘어 주고받는 대화라고 생각했었지요.
물론 그렇게 음악사적인 흐름을 생각하며 목적의식적인 노력을 들이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아끼고 좋아하는 노래가 한두 곡씩은 있는 법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오면 그 곡을 꼭 내 목소리로 다시 불러보아야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노영심이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를 리메이크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겠지요. 노영심은 비록 여진만큼 곱고 멋진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무대에 서서 자신만의 느낌으로 노래를 불렀지요. 참 보기 좋은 풍경이었습니다.
요즈음 들어서는 이렇게 정신과 정신이 대화하는 리메이크를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조성모가 하덕규의 '가시나무'를 리메이크할 때도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지요. 조성모는 먼저 뮤직비디오를 선보이고 그 이미지에 따라 노래를 부르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일본에서 촬영된 '가시나무'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과연 하덕규가 저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떻게 신과 인간의 관계, 즉 구원의 문제를 다룬 노래 '가시나무'를 저따위 신파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것일까? 조성모가 저 노래의 깊은 의미를 진정으로 알고 새롭게 해석한 것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조성모는 무대에 서서 자신의 목소리로 '가시나무'를 불렀지요. 통기타 하나만 들고 고요하게 부르는 하덕규의 '가시나무'를 저는 아직도 좋아하지만, 현악기의 장중한 울림에 묻혀 애절한 눈빛으로 부르는 조성모의 '가시나무'도 들을만은 했습니다. 어쨌든 조성모를 통해 '가시나무'란 노래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하덕규의 바람이 이루어졌지요.
복고 바람을 타고 쏟아지는 신세대들의 리메이크곡들은 정말 귀에 거슬립니다. 76년도에 발표한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꺼야'와 그때는 태어나지도 않은 핑클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그녀들에게 그 노래를 불러야만 하는 기억이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정말 그 곡을 리메이크 한다면, 빠른 댄스곡도 아닌데, 무대에서는 립싱크를 하지 말고 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창력이 없는 것이 문제는 아닐 겁니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이 노래의 제목처럼, 정말 저는 핑클이 이 곡을 선택한 이유를 영영 모를 것 같네요.
소설가 김탁환(건양대 교수) tagtag@kytis.ko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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