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2월2일 첫 방송 이후 장장 5년 4개월간 PD나 작가 등 제작진의 별다른 교체도 없이 국내 최장수 토크쇼의 명맥을 이어온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손꼽을 만한 매력도 없는 40대 유부남 이홍렬(47)의 ‘원맨쇼’가 10대를 겨냥한 다른 TV의 융단 폭격을 어떻게 5년 넘게 비껴갈 수 있었을까.
<이홍렬쇼>는 30%대의 시청률을 구가하던 98년 3월, 방송 100회를 기점으로 홀연히 미국 LA로 어학 연수를 떠난 이홍렬을 1년반 동안 기다렸다가 99년 10월부터 태연히 ‘제2기 이홍렬쇼’를 내보내는 우리 방송 사상 전대미문의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물론 이런 ‘미스터리’의 한 가운데에는 이홍렬이 있다. 그가 KBS 신관 로비에 나타난 건 약속시간 보다 5분 늦은 19일 오후 3시5분.
다른 연예인같으면 준수한 ‘시간 엄수’일텐데 이홍렬은 그 짧은 다리로 헐레벌떡 뛰어오며 “오랜만에 (임)하룡이 형을 만나서”라며 애써 ‘5분’의 이유를 설명하려 했다.
―평소 당신을 탐내던 KBS의 한 부장급 PD조차 “SBS가 간판 상품을 버리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더라. 서운하지않나.
“미국에서 돌아온 후 1년간은 전성기를 이어갔지만 최근 6개월이 문제였다. 나라고 프로그램을 놓고 싶었겠는가. 자기 이름 내건 토크쇼는 개그맨의 꿈이다. 하지만 결국 10%대로 떨어진 숫자(시청률)가 문제였고, 그래서 내가 먼저 내리자고 했다.”
―‘꿈’이라면서 좀 석연치 않다.
“사실 종영 결정이 난 후 SBS측은 <이홍렬쇼> 간판은 그대로 가져가고 코미디를 해보자고 했다. 방송활동 22년간 내내 느꼈지만 ‘벽돌 공장’ 한국 방송의 한계다. 갑자기 컨텐츠를 ‘말(토크쇼)’에서 ‘몸(코미디)’으로 바꾸자는 건데. 단박에 거절한 이유다.”
―최근 끝난 MBC 인기 시트콤 <세 친구>가 같은 시간대(월 밤11시)에 맞불 작전으로 가면서 고생 좀 했겠다.
“내가 지난해 말부터 SBS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 왜 출연한 줄 아나. 시트콤에 치인 게 속된 말로 ‘쪽팔려서’, 내가 출연한 시트콤으로 같은 시간대 경쟁사 프로그램을 눌러보려는 이유 한 가지였다.”
―<이홍렬쇼>는 그야말로 온갖 형태의 ‘말 잔치’였는데.
“별 고민없이 쏟아내는 공허한 말 잔치는 피하려고 했다. 토크쇼라는 게 진행자와 출연자가 쏟아내는 온갖 대화를 어떻게 다양하게 요리하느냐가 핵심이다. 그러다 보니 요리코너인 ‘참참참’을 비롯해 ‘뿅망치 대결’ ‘이니셜토크’ ‘유부클럽’ 등등 형형색색의 ‘포장지’를 동원해야했다. 물론 다른 프로그램들이 우리 프로를 벤치마킹하면서 ‘이홍렬쇼’가 갖던 독창성이 흐려졌고, 본의 아니게 오락 프로그램들이 엇비슷해지는 한가지 원인을 제공하게 됐다.”
―<이홍렬쇼>의 포맷에 대해 얘기를 좀 더해보자.
“18일 방송에서 ‘핑클’이 나왔는데 걔네들 아버지 얘기를 소재로 삼았다. 핑클 아버지가 생각하는 딸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과일, 결혼 적령기 등을 화제거리로 가면서 마지막에 딸이 아버지에게 전하는 메시지까지 끌어내는 식이다. 그냥 ‘요즘 노래 좋더라’는 포맷은 시청자 모독이다.”
인터뷰 도중 잠시 합석한 KBS 예능국 김영선 책임 PD는 “자기 토크쇼라고 이홍렬씨처럼 매번 아이디어 회의에 참석해 자기 의견 개진하는 진행자는 거의 없다”고 거들었다.
―그런데 요즘은 “잘하고 있다”는 내용을 그대로 보여주는 다른 토크쇼나 연예정보프로그램이 활황세다.
“시청자들이 이제는 연예인들의 시시콜콜한 것까지 원하니까. <이홍렬쇼>처럼 가공한 것도 좋지만, 현장에서 날 것을 보여주는 게 더 박진감이 있으니까. 하지만 요즘 보면 좀 심한 것이, 스타급 애들 광고 촬영 현장에 따라가서 “추운 날씨에도 얇은 봄철 의상을 입고 촬영에 열심인 누구누구의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는 식의 멘트를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다. 아니, 그 짧은 노동 시간에 수천만원씩 받으면 그 시간에 그들이 땅을 파든 말든 그게 시청자와 무슨 상관인가.”
―다음달 1일부터 KBS 일을 한다는데, 앞으로는 어떤 프로그램을 하고 싶나.
“퀴즈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아 <퀴즈 정글>(화 오후6시반)이라는 새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됐다. SBS와는 계약기간이 12주 남았지만 양해를 구했고, 대신 동료인 이성미의 출산 휴가동안 이경실과 함께 <진실 게임>을 두달간 하기로 했다. 요즘은 성인 토크에 강한 매력을 느낀다. 성인 토크의 핵심은 은유인데, 예를 들면 이렇다. 아내를 보석상자로 칭하겠다고 전제한 뒤 토크를 시작한다. 그리고선 ‘너 보석상자 요즘 얼마나 열어보니’ ‘하도 안 열어서 먼지가 낄 정도야’ ‘정기적으로 열어야지 나중에는 여는 법도 까먹는다’ 등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식이다.”
―마지막 방송은 어떻게 하나.
“누구는 호텔 빌려서 했지만 우리는 조용히 간다. 그냥 일산에 카페 하나 빌려서 정리하는 분위기로 할 거다. PD는 ‘다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멘트로 끝내자고 하는데 그냥 ‘그동안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수준으로 끝내련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나면 시청자들이 더 좋아할 수도 있겠지.”
<이승헌기자>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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