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법관도 아니고 성질이 남에게 심판 받을 만큼 그렇게 악하진 않아서 법원 문턱에도 못 가봤지만, 영화를 많이 본 덕에 '법정'에 대해선 좀 안다. 법정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보다 '밖'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더 재미있다는 것을. 법정 스릴러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법정 바깥에서 벌어지는 '비밀스런 사연'에 있다.
법정 공방전을 다룬 스릴러 영화는 할리우드에서도 심심지 않게 만들어졌다. 미국 대중소설가 존 그리샴의 소설을 원전으로 한 영화들은 대부분 법정 스릴러다. <펠리칸 브리프> <의뢰인> <타임 투 킬> 등이 바로 그의 손길을 거쳐간 작품들.
어디 그 뿐인가. 담배 회사의 비리를 파헤친 <인사이더>, 악마의 사주를 받은 비열한 변호사의 인생극장을 그린 <데블스 에드버킷>, 환경오염의 원흉인 모 대기업과 힘없는 마을 주민의 투쟁을 담은 <에린 브로코비치> 등도 모두 법정 공방전을 전면에서 다룬 영화였다.
법정 스릴러이면서 동시에 멜로 영화였던 작품도 가끔은 있었다. 미미 로저스와 빌리 제인이 주연한 <크라임 게임>. 남편 살해 혐의로 7년째 교도소에 수감된 사형수 여자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데 그녀의 새 연인은 바로 교도소 간수다.
<인디안 썸머>는 남편 살해 혐의로 법정에 선 한 여자와 그녀를 변호하던 남자가 어찌어찌해서 사랑까지 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죽고 싶다는 말이 살려달라는 말 보다 더 절실하게 들린다"는 변호사 준하(박신양)는 신영(이미연)을 믿는다. 그녀는 남편을 죽일 만큼 모진 여자가 아니었고 증거 자료는 충분했다. 여자는 말이 없다. 그저 죽고 싶다고, 죽으면 기억하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고 울먹일 뿐이다.
그녀가 남편을 죽였는지, 아닌지는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그리 중요치 않다. 이미 각종 기사를 통해 이 영화가 스릴러이자 동시에 멜로 영화임을 알고 있는 관객들은 다만 이것이 궁금할 뿐이다. "도대체 두 사람은 언제 사랑에 빠지는 거야?"
신영이 사형 당하지 않을 걸 뻔히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는 스릴러로선 '김 빠진 맥주'다. 긴박감은 너무 적다. 그녀는 사형 선고를 받지 않을 것이고 곧 준하와 사랑에 빠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교도소 담장을 넘게 되려나?
적어도 <인디안 썸머>가 탈옥영화라는 소문은 들어본 적이 없으므로, 그것도 틀렸다. 신영은 무죄 판결을 받고 제 발로 당당히 법정을 걸어나온다.
그때부터 두 사람 사이엔 사랑이 싹튼다. 인사동을 배회하다 우연히 재회한 두 사람은 따끈한 차로 서로를 염탐하고, 술로 마음을 풀고, 결국엔 낭만적인 야간여행까지 떠난다. "이게 내가 제일 하고 싶던 일"이라며 무단 결근을 해버린 준하는 결국 그날 이제 더 이상 사형수가 아닌 신영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인디안 썸머>는 거기서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죄를 벗었던 그녀는 다시 죄인이 되고 법원 안팎의 풍경은 더욱 어수선해진다. 이제 단순히 변호사와 피고인이 아닌 두 사람은 어떻게 이 사건을 해결해나갈까. 신영은 끝까지 말이 없고 운동화 차림을 좋아하는 낭만파 변호사는 끝까지 비주류적이다.
혼자 어수선해진 준하와 유난히 고상한 신영. 두 사람의 사랑은 아리송하다. 한국 멜로 영화의 유일한 미덕이 된 '눈물빼기' 조차 이 영화엔 없다. 그렇다고 숨막히는 스릴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인디안 썸머>의 두 주인공이 법원 안팎을 서성거렸던 것처럼 이 영화는 멜로와 스릴러 사이를 '본때 없이' 서성거린다.
<인디안 썸머>를 본 후 난 오래 전 보았던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정범태의 <서울 경기 고등군법재판소>. 내가 처음 이 사진을 보게 된 건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렸던 '한국 사진예술 80년전(전시회 제목은 정확치 않다)'에서였다. 한 여자가 사형을 언도 받는 순간 그 상황을 알 리 없는 아이가 엄마 품에 달려드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은 사진이다. 난 이 사진 앞에서 발을 멈췄고 오랫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사연 있는 사진은 남다른 울림이 있다. 법정 스릴러가 법정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보다 더 스릴 있는 이유도 '사연'을 알기 때문이다.
똑같이 사형수를 모티프로 한 두 개의 '예술'은 그러나 내게 너무도 다른 감흥으로 다가왔다. 적어도 <서울 경기 고등군법 재판소>엔 진심이 있었고 <인디안 썸머>엔 진심 대신 상업적 기승전결만 있었다.
아주 예쁘게 포장됐지만 <인디안 썸머>는 환영처럼 왔다 사라진다는 '가을과 겨울 사이의 이상한 여름' 인디안 썸머와 닮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 꿈결같은 여름을 겪다 나온 것처럼 몽롱해진다. 그뿐이다.
황희연<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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