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속에선 줄곧 '라밤바'나 '불놀이야'같은 흥겨운 음악이 흐르고 잊혀진 옛 연인의 매혹적인 재회도 이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와이키키 브라더스>엔 리듬을 타는 흥겨움 대신 슬픔이 흐른다.
느리고 건조하게 흐르는 이 영화는 남은 삶이 많기에 오히려 더 비참했던 <세 친구>의 그 아이들이 만일 음악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를 상상하게 한다. 감독 자신도 "<세 친구>와 닮은꼴"이라고 고백한 이 영화는 젊은 날의 꿈과 우정을 담은 성장영화이자 장르의 관습을 뺀 음악영화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노래방이나 가라오케에 밀려 시대착오적인 직업으로 전락한 3류 밴드의 이름. "오늘이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마지막 연주 날"이라고 고백한 밴드 단원들은 아쉬운 얼굴로 슬픈 음악을 연주하고 플로어에 모여있는 중년 남녀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춤을 춘다.
<와이키키 브러더스>는 몇몇 아이러니컬한 상황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이상한 화법을 택한다. 포복절도할 만한 웃음 대신 씁쓸한 미소가, 슬픈 눈물 대신 따뜻한 회한의 눈물이 흐르는 이유가 바로 그거다. "알몸으로 연주하라"는 손님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 주인공은 주먹을 날리는 대신 진짜 옷을 벗고, 프로포즈를 할 것 같은 상황에선 "이제 떠나야 한다"는 말만 남긴다.
마지막 공연 이후 막다른 골목에 놓인 밴드 단원 성우는 15년간 떠나 있었던 고향 수안보로 발길을 돌린다. 그곳에서 그는 고교 시절 밴드를 함께 했던 친구들을 다시 만나지만 여전히 현실은 어둡다. 성우는 그곳에서도 여전히 밤무대 3류 밴드다.
영화는 성우가 고향에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친구들을 만나고 어린 시절 짝사랑한 인근 여학교 보컬 출신의 인희와 재회하는 모습을 과장 없이 보여준다. 그리곤 암울하지만 희망의 출구는 보였던 고교 시절의 어느 한 시점으로 카메라를 옮겨간다. 이제는 희미해진 옛 시절의 추억 속으로.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 비참한 현실에서 찬란했던 과거로 넘어가는 시간의 역행 구조를 통해 삶의 비참함을 극대화시킨 것과 유사하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그들의 모습은 창백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알몸으로 해변가를 뛰어다니고 창고에서 음악 연습을 하고 여학생 뒤꽁무니를 좇던 그때 그 시절. 하지만 현재의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예전의 그 친구들이 아니다.
<친구>에서 곽경택 감독이 읊조렸던 친구에 대한 상념은 이 영화에서 좀더 비관적으로 바뀐다. "니는 니처럼 살아라, 내는 내처럼 사께"라고 말했던 <친구>의 그들처럼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그들도 배추장사로, 약사로, 말단 공무원으로 각자의 삶을 걸어간다. 하지만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그들은 "친구니까"라는 말로 서로 감싸안는 법을 모른다. 그게 사실은 더 현실적인 우리 시대 친구의 모습이다.
한 친구는 묻는다. "너는 행복한가? 그래도 우리 중에 하고 싶은 일 하며 사는 건 너 밖에 없지 않나!" 성우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지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영화의 라스트 신이 되면 성우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은 그 대답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인희와 함께 와이키키 브러더스를 재조직한 성우는 무표정한 얼굴을 거두고 드디어 영화 속에서 처음 미소를 띄운다. 별 것 아닌 행복이 드디어 내게도 찾아왔다는 듯이.
<와이키키 브러더스>는 아주 처절한 방식으로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결국은 희망을 말하고 있는 영화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행복하지 않느냐고. 이것은 어쩐지 임순례 감독의 생각을 반영한 말처럼 들려 재미있다. 4년에 한 번 씩 영화를 만드는 '올림픽 감독(?)'일지라도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니 행복하지 않느냐고, 그런 슬픈 독백이 귓가를 맴돈다.
황희연<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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