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디지털 삼인삼색 섹션에 참여한 감독은 <애정만세> <하류> <구멍> 등을 통해 소통의 기회를 잃은 도시인들의 절망을 이야기한 대만의 차이밍량 감독, <소무> <플랫폼>을 통해 균열된 중국 사회의 단면을 잡아낸 바 있는 중국의 지아장커 감독, <폭동>으로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N-비전 부문 대상을 수상한 존 아캄프라 감독.
이들이 작업한 세 가지 색깔의 디지털 중편이 하나로 묶여 지난 28일 전주 덕진문화예술회관에서 첫선을 보였다. 디지털 영화 작업을 처음 시도한 차이밍량 감독과 지아장커 감독의 영화는 습작 성격이 강했으며 이미 10년 이상 디지털 영화 작업을 해온 존 아캄프라 감독의 영화는 빼어난 연륜이 묻어난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아장커의 카메라는 몇 번의 공간 이동을 제외하곤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공공장소>라는 제목에 걸맞게 허름한 기차역, 벌판에 세워진 스산한 버스 정류장, 버스를 개조한 식당, 댄스 교습소 등을 돌며 그 안에서 숨쉬고 있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낸다.
남루한 삶을 사는 중국인들의 얼굴엔 표정이 없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카메라도 흔들리고 그 안에 담겨진 사람들의 얼굴도 함께 흔들린다. 어차피 인간이란 존재는 세상의 흔들림에 무방비 상태일 수밖에 없다는 듯이. 모택동의 사진이 장식된 휠체어를 타고 있는 노인의 얼굴에선 삶의 포기마저 묻어난다. 하지만 지아장커 감독은 댄스 교습소에서 탱고를 배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역설적으로 희망을 말한다.
그는 이 영화에서 절대 뭔가를 연출하진 않았다. 카메라가 있고 공간이 있고 그 안을 오가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공공장소>는 너무하다 싶을 만큼 꾸밈이 없는 다큐멘터리이자 공간에 관한 원시적인 탐구다. 지아장커 감독의 내면 세계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고 디지털적 형식 실험만 남아있다.
지아장커에 비해 차이밍량 감독은 좀더 충실한 연출의 미덕을 보여준다. 그는 디지털 중편 <신과의 대화>에서 이상한 의식을 치르고 있는 종교인들의 모습과 신 내린 무당, 지하도, 스트립쇼를 하는 여자들, 죽은 물고기와 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전신주를 아무 거리낌없이 카메라에 담는다.
어떻게 보면 지아장커의 <공공장소>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연출 방식이지만 둘 사이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신과의 대화>엔 차이밍량 감독의 상념이 들어있다. 그는 촬영을 저지하는 스트립쇼 아가씨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담아냄으로써 촬영하는 순간의 현장감까지 영화 속에 꼼꼼히 가미했다.
인간의 저열한 본능과 이성적 고양, 삶과 죽음이 충돌하는 지점에 촉수를 내민 차이밍량 감독은 "이렇듯 완벽하게 상반된 것들이 모여 있는 게 바로 세상 아니냐"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아쉽게도 <신과의 대화> 역시 습작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디지털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덴 실패했다.
반면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디지털 영화 운동을 시작한 존 아캄프라 감독은 <디지토피아>에서 숙련된 디지털리스트의 내공을 보여준다. 그의 영화는 영화라기보다 한 편의 영상시에 가깝다. 필터를 갈아 끼운 화면은 과장된 붉은 색과 푸른색, 노란 색으로 자주 뒤바뀌고 그 위에 한 남자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세상이 수축된다면 시간은 거꾸로 흘러가겠지. 그럼 난 다시 젊어질 수 있을 텐데. 그럼 어떤 음식을 먹어도 모두 소화할 수 있을 거야." 과거에 대한 연민이 배어있는 내레이션과 함께 사랑을 갈구하는 한 남자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인터넷과 전화로 성을 매매하는 남자는 타냐라는 이름의 매춘부와 함께 뉴욕에 가길 꿈꾼다. "나 뉴욕에 있어! 여긴 정말 좋아. 뉴욕에서 나와 함께 살지 않을래?" 남자는 디지털적 욕망을 현실 세계에까지 연장하길 꿈꾸지만 현실은 다르다. 그의 순결한 사랑은 끊임없이 외면당하고 대신 육체적인 욕망은 쓸쓸히 채워진다. 정신적 욕망과 육체적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남자의 모습을 통해 존 아캄프라 감독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본질적으로 되묻는다.
시적인 대사와 파격적인 화면 구도로 채워진 존 아캄프라 감독의 <디지토피아>는 그 어떤 필름으로도 구현하지 못할 것 같은 색다른 질감의 영상을 보여준다. 올해 '디지털 삼인삼색' 섹션이 가져다 준 최고의 미덕은 바로 존 아캄프라를 '발견'하게 해준 것이 아닐까.
지아장커와 차이밍량은 필름 영화를 통해 이미 세계적인 감독이 됐지만 존 아캄프라는 줄곧 영화사의 뒤편에만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제2회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에서 선보인 아캄프라의 디지털 영화 <디지토피아>는 분명 심상치 않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디지털의 가능성이 얼마나 무궁무진한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 주류영화계가 배출한 최고의 디지털리스트로 빔 벤더스를 꼽을 수 있다면, 그 반대편엔 분명 존 아캄프라가 있다.
황희연<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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