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구로사와 키요시 감독 "내 작품은 모두 실패작"

  • 입력 2001년 5월 1일 20시 07분


기자회견에 나온 구로자와 키요시 감독(왼쪽)
기자회견에 나온 구로자와 키요시 감독(왼쪽)
"내 작품은 모두 실패작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의 작품을 한참 낮춰 말했지만 사실 구로사와 키요시 감독의 영화는 암암리에 전 세계 영화 마니아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리쿄 대학 사회학부를 졸업한 그는 대학시절부터 8mm 영화를 만들었고 <도레미파 소녀의 흥분> <지옥의 경비원> <큐어> 등의 장편을 만들어 전 세계 넓은 팬층을 확보했다.

호러, 액션, 판타지 등의 익숙한 장르 안에 만만치 않은 주제를 담아 온 그는 4편의 영화를 들고 제2회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았다. 이번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키요시 감독의 작품은 호러답지 않은 호러영화 <지옥의 경비원> <강령>, 한 권의 철학서를 방불케 하는 <카리스마>, 짧지만 헛되지 않은 생을 살았던 한 청년의 아이러니컬한 삶의 이야기 <인간합격> 등. 특별전 참석을 위해 전주를 찾은 구로사와 키요시 감독에게 자신의 영화세계와 일본 영화계의 현재에 대해 들어보았다.




▼당신의 영화는 한 감독의 작품답지 않게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다. 영화를 만들면서 당신이 일관되게 추구하는 게 있다면?

- 그런 말을 듣게 돼서 너무 기쁘다. 기본적으로 난 '영화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 또 영화와 '영화 아닌 것'의 경계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영화를 만들 때마다 새로운 경계선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때 아주 기쁘다.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기에 영화와 영화 아닌 것의 경계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솔직히 아직 그 경계선이 뭔지를 잘 모르겠다. 매번 한 발만 잘못 내딛으면 영화 아닌 것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위험을 느끼며 영화를 만든다.

▼이번 구로사와 키요시 특별전에 초대된 4편의 영화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다면?

- <지옥의 경비원>은 미국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를 가지고 얼마나 미국영화와 비슷하게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만든 영화였다.
반면 <인간합격>은 미국영화와는 정반대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미국영화답지 않은 작품으로 관객들을 얼마만큼 즐겁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 일부 평론가들은 좋다고 했지만 흥행에선 완전히 실패했다. "지겹고 도대체 뭘 말하려는지 모르겠다"는 평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내 실험은 실패한 셈이다.
<카리스마>는 추상적인 테마를 어떻게 액션, 코미디, 호러 장르와 접목시킬 수 있을까 알아보기 위해 만든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 역시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평이 많았다. 결국 이것도 실패작이다.
<강령>은 되도록 실험을 피하고 적은 예산으로 좋은 영화를 완성해보자는 생각에서 만들었다. 스스로는 잘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좀더 대담한 실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후회가 많이 남는다. 그래서 이 작품도 결국 실패작이다. 내 작품은 모두 실패작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에게 특별히 영향을 준 작품이 있다면?

- 학생시절 가장 많은 영화를 봤다. 그때 즐겨봤던 영화는 70년대 미국 액션영화였는데 그 영화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아직 유명해지기 전 미국 영화계엔 알기 쉬운 장르로 복잡한 테마를 전하는 영화들이 아주 많았다. 내 영화도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알기 쉬운 장르로 복잡한 테마를 전하고 싶다.

▼한국영화를 본 적이 있나? 봤다면 어떤 느낌을 받았나?

- <8월의 크리스마스> <거짓말> <쉬리> 등의 영화를 봤다. 그 외에 다른 영화도 본 적이 있는데 제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몇 편의 한국영화들을 보면서 참 다양한 영화들이 만들어지는 나라라는 느낌을 받았다. 다양한 영화들이 만들어지는 영화계는 좋은 영화계다.

▼당신의 영화엔 일본 사회의 어두운 면을 묘사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개인적으로 당신은 일본 사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난 정치가도, 학자도 아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선 사실 잘 모른다. 그러니 개인적인 의견임을 염두에 두고 들어주기 바란다. 현재 일본 사회는 몇 십 년간 지키고 있던 가치관이 붕괴되고 있는 상태다. 혼란의 중심에 있다.
하지만 난 일본 사회에 더한 혼란이 와도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현재 일본에 찾아온 혼란은 기분 좋은 혼란이다. 난 사회가 하나의 가치관을 가지고 맹목적으로 흘러가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재 일본에는 호러 및 성인 영화들이 많이 발달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 최근 호러나 SF 장르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건 아무래도 TV의 영향인 것 같다. 일본 사람들은 현재 영화보다 TV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그러다 보니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TV 드라마와는 다른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적은 예산으로 TV 드라마와 다른 작품을 만들어야 하니 호러나 에로 장르가 많아지는 것 같다.

▼현재 일본 영화계의 상황은 어떤가?

- 일본에선 영화 만들어서 돈을 버는 게 너무 어렵다. 그렇다고 명예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일본 영화감독의 지위는 상당히 낮다. 따라서 현재 일본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엄청난 영화광들이다. 영화를 꼭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만 영화계에 진출한다. 감독뿐 아니라 프로듀서도 마찬가지다. 야쿠자 영화나 호러, 판타지 등 장르에 상관없이 일본영화에선 어딘가 '인디'적인 냄새가 나는데, 그 이유는 영화광 출신들이 프로듀서가 됐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감독들이 인디적인 취향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하면 "그거 정말 좋은데"라고 말하며 부추겨 준다.

▼일본 내에서 주류와 인디 영화계의 교류는 활발히 이뤄지고 있나?

- 현재 일본 내에 주류와 인디 영화의 구분은 없다. 나조차도 내가 주류인지 인디 영화인인지 잘 모르겠다. 인디 영화계에서 작업하던 사람이 어느 날 일본 최고의 메이저 영화사인 도호에서 작업하기도 하고, 그 다음엔 다시 인디 영화계로 돌아오는 일이 반복된다. 사실 세계 무대에서 일본영화는 모두 인디 영화가 아닐까. 인디와 주류의 경계가 없어진 이유 중엔 프로듀서가 젊어졌다는 점도 꼽을 수 있다.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프로듀서가 어느 날 내게 "대학 때 당신이 만들었던 8밀리 영화를 보고 그때부터 당신의 팬이 됐다. 같이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부탁해왔다. 솔직히 그 영화들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형편없는 수준인데 젊은 프로듀서들은 영화광 세대이기 때문에 다른 관점에서 내 영화를 받아들인다. 그게 일본 내에 인디 영화와 주류영화의 경계를 없앤 이유가 아닐까 싶다.

▼다작하는 스타일인 것 같다. 일년에 3편씩 영화를 만드는데, 그런 열정은 어디서 나오나?

- 평균적으로 시나리오를 쓰는 데 1개월, 촬영 준비하는 데 1개월, 촬영하는 데 2-4주, 후반작업 하는 데 약 1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이런 페이스로 작업을 하면 1년에 2,3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다.
난 항상 내가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기 때문에 '지금 만들고 있는 영화가 유작이 되면 안 되는데, 그럼 너무 창피한데'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그래서 빨리 다음 영화를 만든다.

▼당신 영화에선 장 뤽 고다르 영화의 테크닉이 많이 눈에 띈다. 고다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나? 그밖에 특별히 영향을 받은 일본 영화인이 있다면?

- 물론 장 뤽 고다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내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된 이유도 고다르의 영향 때문이다. 고다르는 내게 영화 자체가 영화의 테마가 될 수도 있음을 가르쳐준 감독이다. 고다르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미국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나도 70년대 미국영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니까, 그 점에서 고다르와 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 감독 중엔 아무래도 소마이 신지 감독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난 그의 조감독으로 일했다. 또 오즈 야스지로나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도 좋아한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 내에 스튜디오 시스템이 활성화됐을 때 활동했던 감독들이고 난 그렇지 않다. 따라서 두 사람의 영화를 좋아하지만 영향 받은 건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외국인들이 당신의 영화를 볼 때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나?

- 글쎄. 그런 건 별로 없다. 일본에서 내 영화를 보는 관객은 많아야 1만 명 이하다. 최근엔 외국에도 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그래봤자 각 나라 당 1만 이하다. 난 내 작품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각 나라 당 1만 명씩만 있었으면 좋겠다. 그럼 꽤 많은 사람이 내 영화를 볼 것 아닌가.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내 영화를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다음에 만들 영화는 어떤 작품인가?

- 이제 슬슬 시나리오를 써볼까 하는 참이다. 최근 호러영화를 너무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되도록 다른 장르의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았다.

황희연<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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