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아버지 세대를 부정하는 영화<휴머니스트>

  • 입력 2001년 5월 3일 13시 55분


"싸구려 휴머니즘에 빠지지 말라"고 권하는 <휴머니스트>는 절대 닭살 돋는 감정 과잉을 만들지 않는다. 한국영화의 눈물 빼기 작전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의지일까. 영화 속 캐릭터들은 모두 무표정한 얼굴로 기존의 가치관을 뒤엎는 행동만 일삼는다.

가진 건 돈밖에 없는 고관장성의 아들 마태오(안재모), 그림을 팔아서 근근히 먹고 사는 3류 화가 유글레나(강성진), 먹고 싸는 것밖에 모르는 단세포 생물 아메바(박상면). 이들 세 사람은 태오의 아버지(박영규)를 납치해 한몫 잡아보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엉뚱한 사람을 납치하는 바람에 애를 먹는다. 이들이 납치한 인물은 에로 배우 출신인 태오 새어머니의 정부.

납치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함께 끌려온 수녀(명순미)는 도시적인 외모와 달리 벌교 사투리를 심하게 구사하고, 돈밖에 모르는 태오 아버지는 아들보다 더 오래 살고 싶다는 헛된 꿈을 안고 살며, 공익을 위해 일해야 할 경찰은 뒷돈을 요구하기 바쁘다.

▲ 관련기사

[씨네리뷰]<휴머니스트> 사회악 풍자한 엽기 페스티발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 않은 <휴머니스트>의 그들은 딱 한 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를 부정하는 사람들.

<휴머니스트>는 아버지 세대의 영화와 가치관을 철저히 거부한다는 점에서 발칙하고 도발적이다. 아버지 세대의 영화는 논리적인 기승전결과 따뜻한 휴머니즘을 유일한 미덕으로 여겼지만 <휴머니스트>는 논리적인 기승전결 대신 파격적인 형식 미학을, 싸구려 휴머니즘 대신 냉정한 실리주의를 택했다.

심지어 <휴머니스트>는 영화의 오랜 관습인 선과 악의 구분마저 모호하게 만든다. 배신과 부정부패로 채워진 각각의 캐릭터들은 예상치 못한 몇 가지 행동을 통해 '자신이 전적으로 악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고아원 출신인 유글레나와 아메바, 성당 앞에서 썩은 다리가 문드러지는 줄도 모른 채 술만 진탕 퍼마시는 거지, 사투리 쓰는 수녀와 인자함이 부족한 신부 등. <휴머니스트>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버지가 없거나 아버지가 되기를 끝내 거부한 사람들이다.

유일하게 아버지가 있는 캐릭터인 마태오 역시 아버지를 아버지답게 바라보지 않는다. 태오에게 아버지는 유흥비를 조달해주는 물주 이상은 아니며 외디푸스 콤플렉스에 빠진 자신이 끝내 물리쳐야 할 대상이다.

다만 태오가 아버지 납치 프로젝트를 계획한 이유 중 하나가 아버지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라는 점을 감안하면, <휴머니스트>가 아버지의 존재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휴머니스트>는 아버지를 부정하는 척하면서 결국 아버지의 존재를 열렬히 갈구하는 영화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이무영 감독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영화의 라스트 신에서 이무영 감독은 돼지우리 속에 목매달고 자살한 자신의 모습을 슬픈 음악과 함께 카메라에 담는다. 이는 어차피 혼자 왔다 혼자 돌아가는 유아독존의 삶에 대한 위악적인 패러디.

팝 칼럼니스트이자 <삼인조> '공동경비구역 JSA' 등의 시나리오를 쓴 이무영 감독은 자신의 연출 데뷔작인 <휴머니스트>에서 B급 영화에 대한 매혹을 유감 없이 드러낸다. <저수지의 개들>부터 <조용한 가족>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의 엽기 코미디와 싸구려 스릴러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장면이 줄기차게 이어진다.

유글레나가 개에게 '고추'를 물어뜯기는 장면은 아이들 낙서 같은 1단 짜리 만화커트로 구성됐고 납치 프로젝트의 효과를 설명하는 장면은 TV 재연 화면처럼 구성됐다.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벌교 사투리를 심하게 구사하는 수녀, 열혈 기독교인이면서도 사랑과 믿음의 정신은 눈꼽만치도 없는 아버지, 농담 같은 삶을 사는 세 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영화 속에서조차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캐릭터들이다.

이렇듯 독특한 캐릭터들을 모아 독특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나섰지만 <휴머니스트>는 결과적으로 형식의 덫에 갇히고 말았다. 파격적인 화면 구도, 색다른 시나리오, 뜬금 없지만 묘하게 어울리는 음악 등 따로 떼어놓고 보면 나름의 미덕이 있는 각각의 요소들은 윤활유를 제대로 치지 않은 듯 연신 삐그덕거린다.

다만 일찍이 실험해 보지 않았던 것들을 경직되지 않은 시선으로 풀어 가는 감독의 실험정신은 인정할 만하다. B급영화 마니아였던 박찬욱 감독이 결국 'JSA'로 대박을 터뜨렸듯 이무영 감독 역시 몇 편의 실험을 거치고 난 뒤 뭔가 다른 지점으로 점프할 것 같다. <휴머니스트>는 이무영 감독의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영화다.

감독 이무영/주연 안재모 박상면 강성진 박영규 명순미/개봉일 5월12일/홈페이지 http://www.ihumanist.com/

황희연<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