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밑까지 내려오는 철모의 독일 병사가 미군의 총탄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면 손바닥이 아프도록 갈채를 보냈고 미군 병사의 유해를 담은 관이 성조기에 덮여 땅속에 묻히면 한참동안 눈물을 글썽였다.
19일 개봉하는 「에너미 앳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s)는 할리우드 메이저사인 파라마운트가 제작했으면서도 이런 도식에서 벗어나 신선한 충격을 준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의 주적(主敵)이었던 독일과 종전 후 동맹국에서 주적으로 바뀐 소련의 대결을 그려내 선악의 이분법이란 덫을 피할 수 있었다.
「연인」으로 잘 알려진 장 자크 아노 감독이 프랑스 태생이고 독일이 자본의 일부를 댔다는 점도 이 영화가 할리우드식 영웅주의 냄새를 덜 풍기는 데 보탬이 된 듯하다. 지난 2월 베를린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보여 까다로운 유럽 영화인들의 입맛을 만족시켰다.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2년 10월 독일이 중앙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해 소련의 서쪽 영토를 잠식해들어오자 소련군은 마지막 보루인 스탈린그라드(현 볼고그라드) 사수에 나선다. 전쟁터에서 소련군 병사 바실리의 기막힌 사격솜씨를 목격한 선전장교 다닐로프는 아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그를 영웅으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저격수가 된 바실리가 연일 독일 장교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며 일약 `붉은 군대의 별'로 떠오르자 독일은 사격학교장 코니그 소령을 급파해 맞대결을 시킨다. 영화 중간중간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연상시키는 사실적인 전투장면이 이어지지만 `둘만의 전쟁'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을 이완시키는 또다른 축은 여병사 타냐를 둘러싼 삼각관계. 다닐로프는 바실리에 대한 질투심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탄생시킨 영웅의 실체를 폭로하다가 파멸을 맞고 바실리는 최후의 대결에서 승리한 뒤 야전병원에서 타냐와 감격적으로 재회한다.
장 자크 아노는 미국식 영웅주의를 정면으로 거부하지만 영웅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는 듯하다. 바실리가 전설적인 영웅으로 떠올랐다가 몰락하는 과정을 냉소적으로 그려내면서도 평범한 인물 속에 영웅적 모습이 담겨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찌보면 그가 「티벳에서의 7년」에서 달라이 라마를 진정한 영웅으로 추켜세운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장 자크 아노는 미국식은 거부했지만 서방류에서는 탈피하지 못했다. 다닐로프가 숨을 거두며 내뱉은 "평등한 사회를 만들면 부러운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소비에트에서도 재능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랑 받는 자와 못 받는자가 존재해…"라는 대사에서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 진영의 자부심이 뚝뚝 묻어난다.
「리플리」의 주드 로,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조셉 파인즈, 「미이라」의 레이첼 와이즈 등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 나가는 젊은 배우 트리오가 삼각관계를 연기하며 매력있는 악역 전문배우 에드 해리스가 바실리의 천적으로 등장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다소 지루함을 느낄 정도로 화면 속도가 처지며 유럽 영화치고는 깊이가 부족한 느낌. 좋게 보면 할리우드와 유럽 영화의 장점을 고루 지닌 수작이다.
[연합뉴스=이희용 기자]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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