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의 조언을 들었을 리 없는 독일 감독 바이트 헬머는 자신의 장편 데뷔작 <투발루>에서 음악뿐 아니라 아예 대사까지 제거한다. <투발루>의 대사는 A4지 한 장에 모두 나열할 수 있을 만큼 적다.
말없이(?) 감동을 주는 <투발루>는 분명 색깔이 있지만 일반적인 컬러 영화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독창적인 빛깔을 띠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투발루>는 흑백으로 촬영된 뒤 그 위에 색깔을 덧입힌 이상한 컬러 영화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에서 흑백화면으로 잡은 한 소녀의 옷을 분홍색으로 물들였듯, 독일 감독 바이트 헬머도 그렇게 했다.
각 시퀀스 별로 독특한 색깔을 띤 <투발루>는 말하자면 흑백 무성영화에 대한 독특한 오마주다. <투발루>의 주인공들은 무성영화계 스타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처럼 스타카토 리듬을 타고 움직이며 대사는 지극히 자제한다. 색은 있지만 흑백 화면같은 빛바랜 느낌을 준다.
낡은 스튜디오에서 찾아낸 40년 전 거대 헤드라이트를 조명기로 사용하고 아비드 편집기 대신 낡은 재단 책상에서 필름을 편집한 <투발루>는 디지털 영화가 판치는 현대영화의 흐름을 완전히 거스르고 있다.
영화가 아주 오래 전 실용성을 위해 포기했던 많은 것들을 이 낯선 독일 영화는 재현하고 있는 셈이다. 슬랩스틱 무성 코미디를 모방한 <투발루>엔 고전의 향기가 물씬 묻어나고, 드물게 새로움이 흐른다.
내용 역시 새롭다. 낡은 수영장을 운영하는 안톤(드니 라방)과 아버지와 함께 그곳을 방문한 소녀 에바(술판 하마토바)의 사랑을 담은 이 영화는 기존의 가치관을 완전히 뒤엎는다. 수영장 입장료는 돈이 아니라 단추고 그들만의 유토피아 '투발루'로 가는 배의 부속품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수영장 동력기다.
말도 안 되는 상상력으로 채워진 이 영화는 그러나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엽다. 첫 눈에 에바에게 반한 안톤과 수영장에서 목숨을 잃은 아빠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안톤을 멀리하는 에바. 두 사람의 사랑은 슬랩스틱 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웃기면서도 풋풋하다.
이 영화에는 남에게 상처줄 줄 모르는 풋풋함과 따뜻한 연민이 흐른다. 눈 먼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한산한 수영장 안에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틀어놓는 아들, 수영장 폐쇄를 막기 위해 온 동네 사람들이 부실한 부분을 보완해주는 모습 등은 모두 따뜻한 사랑으로 넘친다.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사회는 그들이 그토록 가고자 했던 투발루가 아니라 바로 그 수영장 안이 아닐까. <투발루>는 멀리 있는 줄 알았던 '유토피아'가 우리 가까이 있음을 넌지시 알려주는 따뜻한 영화다.
<나쁜 피> <퐁네프의 여인들> 등에 출연했던 개성파 배우 드니 라방이 찰리 채플린을 닮은 남자 안톤을 맡아 열연하며 <루나 파파>의 귀여운 미혼모 술판 하마토바가 에바 역을 맡아 빛 바랜 화면에 생기를 더했다.
황희연<동아닷컴 기자>benotbe@donga.com
원제 Tuvalu/감독 바이트 헬머/주연 드니 라방, 술판 하마토바/개봉일 5월19일/등급 15세 이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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