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프로그램은 손앞에서 만져질 듯 클로즈업된 책들의 행진에서 시작해 헝가리의 수도원, 이탈리아와 독일, 뉴욕과 도쿄, 서울의 활판 인쇄소와 경기도의 오프셋 인쇄소를 분주히 오갔다.
그러면서 알을 깨고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한 책의 ‘반란’을 풍부한 영상에 녹여 잘 전달해냈다. 진행자의 표현대로 ‘직사각형의 물체’에 불과한 책이 산전수전 겪은 노인만큼 할 말이 많은 줄, 정말 미처 몰랐다. 하기야 나이로 따지자면 책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매체도 드물 것이다.
이 날 프로그램이 흥미로웠던 것은, 그러나 책의 넋두리 때문은 아니었다. ‘책〓독서’라는 등식을 벗어난 신선한 시각, 그리고 무지했던 구석을 밝혀준 풍부한 정보 때문이었다.
책을 심리치료의 도구로 사용하는 미술치료사, 찰흙과 거울로 책의 고정관념을 깨는 한 조각가의 작품세계는 새로운 매개체로 변신한 책의 모습을 웅변해주고 있었다. 소, 양은 물론, 가오리, 악어 가죽으로 책을 싸는 예술제본가의 섬세한 수작업 과정도 처음 보는 것이었고, 서울의 단 한군데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활판 인쇄가 종이 전체에 화학 약품이 묻는 오프셋 인쇄보다 보존성이 우수하고 눈의 피로가 덜 하다는 것도 몰랐던 일이다.
책 한 권 당 양 두 마리 분의 양피지가 들어간 중세 수도원의 장서에서부터 너무 쉽게 태어나 급기야는 폐지공장으로 향하는, 시대에 따른 책의 다양한 여정도 함께 소개됐다. 자료화면으로 구성한 독일 마인츠와 뉴욕 맨하튼 공공도서관의 화면배경이 한겨울이어서 요즘 계절과 부조화를 이룬 것이 흠이었지만, 현지 취재로 엮은 일본 도쿄의 한 개인서재 이야기는 늘어나는 책과 씨름하는 현대인의 단면을 잘 나타내 주었다.
아무리 분류하고 정리해도 발 디딜 틈 없이 늘어나는 책, 책들. 이 즈음에서 프로그램은 의미있는 질문을 하나 던진다. ‘데이타 스모그’ 라고 할 만큼 정보가 홍수를 이루는 시대, 인터넷과 하이퍼 텍스트가 무한정의 정보량을 빛의 속도로 전달하는 요즘, 한정된 지식을 아날로그식으로 전하는 책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잉크 묻힌 종이의 묶음에 불과한 책의 미래는? 이 물음은 책을 영상으로 전하기로 결심한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과도 일맥 상통하며 진지한 컨텐츠를 구성한다.
프로그램의 자기진단은 계속된다. 틀에서 벗어나려는 책의 몸부림은 아날로그적 언어를 구사하는 인간과의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 그러나 내용의 혁명이 뒤따를 때 진정한 교감도 이뤄질 것이라는 것이다.
책 이야기를 너무 재미 위주로 꾸미려고 애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풍성한 정보와 신선한 시각이 있으면 재미는 저절로 따라온다. 개그맨 공동진행자, 베스트셀러, 인기작가, 연예인 패널. 이런 것들이 아니어도 재미를 구성하는 요소는 많이 있다. 지난주 프로그램에는 이 중 하나도 동원되지 않았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모색해 가는 ‘TV 책을 말하다’가 앞으로 쏟아놓을 내용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박성희<이화여대 교수·언론홍보영상학부>
shpark1@ewh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