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제 맞출 때마다 올라가는 건 점수가 아니라 상금의 액수. 운이 좋으면 김치냉장고나 정수기 같은 보너스도 튀어나오고, 다섯 고개 (5주 연속 우승)를 넘으면 멋진 승용차가 기다리고 있다. ‘찬스’를 쓰고 문제를 맞추면 상금의 곱을 받지만, 틀리면 두 배로 감점을 당한다. 잘못 쓴 ‘찬스’ 때문에 왕창 점수를 잃은 주부들의 성적표에는 마이너스 통장처럼 마이너스가 기록된다 (SBS ‘도전 퀴즈 퀸’·월∼금요일 오전9시 ).
객관식 5개, 주관식 5개 등 난이도별 문제 열 개를 모두 맞추면 상금이 자그마치 2000만원. 그러나 ‘가다가 그만두면 아니 간만 못하다’는 속담만 믿고 끝까지 갔다가는 그나마 쌓아놓은 상금도 못 받고 빈손으로 돌아가기 일쑤다. 적당할 때 포기해야 차비라도 챙긴다. 야박한 것 같지만 때론 너그러울 때도 있다. 정식으로 ‘컨닝’ 할수 있도록 ‘전화 찬스’도 주기 때문이다. (MBC ‘생방송 퀴즈가 좋다’·일요일 오후5시 ).
협동심(같이 살고)인지, 물귀신 작전(같이 죽는다)인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4인조가 동시에 정답을 내야 하는 퀴즈 프로그램도 있다. 성격만 통한다고 손잡고 나올 일이 아니다. 도서관의 칸막이처럼 짜여있는 무대에 선 4명의 출연자는 지적(知的) 주파수가 같아야 퀴즈의 정글을 무난히 헤쳐나가 거액의 상금을 거머쥘 수 있다. (KBS2 ‘퀴즈정글’·일요일 오전8시40분).
시청자는 출제된 퀴즈 문제를 스스로 풀어보며, 화면에 연신 갱신되는 상금의 액수와 대조해 보고, 그 돈의 효용가치와, 지식의 무게와, 그 둘 사이의 균형을 가늠하면서 퀴즈 프로그램을 본다. 마치 운동경기처럼, 룰을 알아야 보는 재미가 있다.
“여름에 장시간 햇볕에 노출되었을 때 심한 두통과 함께 체온이 40도를 넘어가는 병은? 보기 1. 일사병 2.상사병 3. 흑사병 4. 광견병”같은 문제들이 간혹 실소를 자아내게 하지만, 그런 문제도 때때로 틀리는 사람이 나오니 출제자를 나무랄 일도 아니다.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지엽말단적인 지식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지만, 뭐 어떠랴. 대입 수능시험도 아니고, 총체적 지식문화를 선도하는 프로그램도 아니지 않는가.
파편조각 같은 지식들이 눈 깜짝 할 새 돈으로 탈바꿈하는 마술 같은 퀴즈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황금만능주의’ 같은 단어가 떠오르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그런 프로그램을 보는 재미는 정작 딴 데 있기 때문이다.
TV에서 ‘보통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프로그램은 가물에 콩 나듯 찾기 힘들다. 대학생, 유학 준비생, 우유 배달원, 보험 세일즈맨, 주부, 광고 카피라이터, 영어학원 강사…. 다양해서 현란한 우리시대 보통사람들이 ‘소박한’ 꿈을 안고 ‘소박한’ 지식을 겨루는 이런 프로그램은 그래서 격의 없고 친근하다.
어느덧 연예인과 유명인사가 도배해버린 TV화면에서 화장기 없는 얼굴로, 약간 어색한 매너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보통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들이 ‘벌어 가는’ 돈은 그래서 별로 아깝지 않다.
박성희<이화여대 교수·언론홍보영상학부>shpark1@ewha.ac.kr